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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로버츠 대법원장의 특별한 새해인사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미국의 사법부는 매년 1월1일 연방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연차보고서를 발표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사법부의 연차보고서는 통계에 기초하여 사법부의 지난 해 업무실적을 알리고, 의회와 행정부, 국민들에게 새해 사법부의 업무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들을 설명하고 함께 해결할 것을 제안하는 대의회, 대국민 메시지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연방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행사하는 중요한 권한 중의 하나이다. 올해 새해 첫날에도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전통에 따라 사법부 연차보고서를 발표하였으나 그 내용이 파격적으로 간단하여 눈길을 끈다.

"워렌 버거 대법원장은 1970년 사법부의 연차보고서를 발표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관행을 통하여 사법부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국민과 함께 토론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저는 이러한 전통에 따라 사법부가 직면한 중요한 과제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알려왔습니다. 그 중 많은 부분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처럼 의회와 행정부가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있고, 수많은 국민들의 삶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들이 장황한 사법부의 연차보고서를 원치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은 잘 돌아가고 있고, 헌신적인 판사들은 양심적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국의 판사와 법원 직원들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감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올해 연차보고서의 전문이다.

사법부의 예산, 법관 정원, 판사의 봉급 등 현실적인 이슈를 10여쪽에 걸쳐 자세히 다루었던 과거의 연차보고서와 달리 올해의 연차보고서는 달랑 한 페이지가 전부이다. 그 중에서도 실제 내용은 "법원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요"라는 단 한 줄로 요약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십여년 동안 연차보고서에 늘 빠지지 않았던 법관의 처우개선 요구에 대법원장 본인도 지쳤을 테고, 지난 해 의회에서 어느 정도의 법관 보수인상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현재 대법원장은 223,500불, 대법관은 213,900불, 항소심 법관은 184,500불, 1심 법관은 174,500불의 연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법원장은 미국이 사상초유의 경제위기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데다 의료보험 개혁, 악화되는 테러와의 전쟁, 중간 선거 등을 앞두고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사법부마저 아쉬운 소리를 할 때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을 직접 뵐 기회가 몇 번 있었던 필자로서는 위 글이 언행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깔끔하며, 자신감과 위트가 넘치는 로버츠 대법원장의 평소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5년 1월27일 철강회사 중역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시절 풋볼팀 주장 겸 최우등졸업, 하버드 학부 및 로스쿨 최우등 졸업, 로리뷰 편집장을 거쳐 헨리 프렌들리 연방항소법원 판사와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의 로클럭, 백악관 법률고문실, 법무부 송무국, 로펌 파트너, DC연방항소법원 판사를 두루 거친 그는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정통파 인재로서 남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가 대법원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항상 특정 정파에 치우지지 않는 균형감각과 유머 그리고, 담백하고 겸손한 자세로 적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그는 촌철살인의 위트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젊은 시절 레이건 대통령 법률고문실에서 일할 때 워렌 버거 대법원장이 연방대법관들의 업무 부담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기존 항소법원 위에 중간단계의 상고법원을 추가로 신설하자는 의견을 제안하자, 이를 검토한 후 대법원이 매년 약 3개월간의 하계 휴정기를 갖고 있음에 빗대어 "대법원에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이 들려오나, 이 나라에서 아직까지 여름을 통째로 놀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대법관들과 초등학생뿐이라는 것도 엄연한 현실임을 어찌하리"라는 유머러스한 검토 보고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메모는 현재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필자는 로버츠 대법원장의 간단명료한 연차보고서를 접하면서 사법의 본질과 기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날이 갈수록 국가의 시스템이 복잡해지고, 법원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분쟁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사법의 역할과 조직은 불가피하게 팽창하여 거대한 행정부의 모습을 닮아가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사법의 본질은 역시 재판에 있고, 재판은 오로지 정의를 세우려는 판사들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일깨워 준다. 거꾸로 말한다면, 재판을 제대로 하려는 판사들의 의지만 살아있다면 법원은 어쨌든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미국 땅에 풍요의 거품이 걷히면서, 잊혀졌던 평범한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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