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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블랙 레터 로이어

구본진 진주지청장

법과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 4년 동안 늘 함께 했던 친구 T가 있었다. T는 독일어, 한문 등에 탁월했고 재학 중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있었다. 지식의 깊이와 폭이 주변 사람들을 기죽게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섬뜩할 정도의 예리함이었다. T가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은 너무나 날카롭고 정확해서 그렇지 못한 나의 두뇌를 수없이 자극했다. 주변에서 "T는 처음부터 인문대학에 갔어야 하는데 '너무 공부를 잘 해서' 전공을 잘못 택했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T는 졸업 후 '제 전공을 찾아' 인문대 대학원에 갔고 유학을 마치고 모교의 인문대 교수로 있다.

나는 요즘 T가 법조계로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친한 벗이 가까운 직역에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욕심만은 아니다. T만큼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건을 맡아 결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이해,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 같은 것들이 법률지식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검사 경력이 한참 쌓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T의 예리함과 통찰력은 인문학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대법관 홈즈는 그의 유명한 논문 '법의 길'에서 법, 법학, 법학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는데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가 많다. 홈즈 대법관은 법의 문제점에 대해 알고 우리 사회의 현황을 안 후에 올바른 법집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정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법률가를 블랙 레터 로이어(black-letter lawyer)라고 하면서 미래의 법률가는 실정법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학의 모델을 수학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라는 그의 지적은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통렬하다. 그는 법학을 사회과학 더 나아가 인문사회과학의 일종으로 생각하며 법학공부와 연구는 역사학, 경제학, 통계학과 연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부분의 사건은 선례와 규칙에 따라 해결하되 간혹 가다가 어려운 사안과 마주칠 수 있으며, 그럴 경우에 대비해 법률가는 사회적 목적이나 사회적 이익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홈즈 대법관이 이런 말을 한지 벌써 100여년이 흘렀으니 현재는 그가 말한 '미래'임이 틀림없다. 그는 법률가란 실정법을 잘 알고 적용하면 족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보로 남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되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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