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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경제 한파로 몸살을 앓는 미국의 법원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해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수의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미국의 사법시스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하여 미국의 법원을 방문하고 있다. 미국의 연방법원을 방문한 많은 분들은 높다란 천장의 웅장하고 화려한 법원 청사, 차분한 분위기에서 권위 있고 엄숙하게 진행되는 재판, 전혀 붐비지 않는 법정과 한산한 접수창구 등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무게에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항상 이분들에게 연방법원의 화려한 모습이 미국 사법부의 전체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법원이 사회의 갖가지 분쟁과 병리 현상을 치료하는 병원과 같은 곳이라면, 급할 때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동네 의원 혹은 응급실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주법원이기 때문이다. 연방정부는 연방헌법에 근거한 제한적인 권력만을 행사하기 때문에, 연방법원 역시 연방법에 관련된 사건이나 당사자가 주를 달리하는 사건 등 제한적인 관할권을 갖는데 불과하지만 일반적인 소송사건의 90% 이상을 주법원이 처리하고 있으니 실제 일반인이 피부로 접하는 미국의 소송을 보려면 주법원에 가는 것이 맞다.

날씨가 추워지면 동네 병원을 찾는 감기 환자가 늘어나듯 지난해부터 미국에 불어닥친 경제한파로 인해 요즘 미국의 주법원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의 경제는 올해 하반기부터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경기 불황이 재판으로 이어지는 데는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건의 급증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미국 경제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뉴욕주의 경우 올해 접수된 사건이 470만건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중 주택 압류사건이 무려 17% 증가하였고 가정폭력사건은 18%, 경죄사건은 7% 증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지하철의 무임승차나 상점에서 물건을 몰래 들고나가는 생계형 절도사건이 급증하고 소액사건 법정에는 밀린 신용카드 빚을 청구하는 사건이 넘쳐난다고 한다. 플로리다주 역시 주택압류 사건이 2006년에 비하여 446% 증가하였고, 애리조나주는 주택명도 소송이 지난해에 비해 세배가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주정부의 재정은 악화되어 사법부 예산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미국의 주법원에서는 우리로서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펜실베니아주의 법원장은 당초 2010년 법원 예산으로 649만불을 청구했는데 주정부가 예산을 삭감하자, 주정부를 상대로 예산삭감의 효력정지를 구하는 가처분을 법원에 제기하였다. 앨라바마주 대법원장은 주정부가 9%의 사법부 예산을 삭감을 제안하자 이럴 경우 약 500명의 법원직원을 해고해야 하고 모든 민사소송을 당분간 중지하는 사태가 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배심원들의 일당을 지급하지 않고 무료로 봉사하도록 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법원이 문을 닫는 사태도 현실화되고 있다. 영화배우로 유명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지사인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재정위기가 매우 심각하여 사법부 운영비를 줄이기 위한 비상 조치로서 2009년 9월부터 매월 셋째주 수요일에 법원이 문을 닫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당초 일부 지역의 소규모 법원을 폐쇄하는 조치도 거론되었지만, 로널드 조지 주대법원장은 법원 직원들의 대량 해고를 막고 모든 주민들의 동등한 법원 접근권을 보장하며 양질의 재판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강제 휴무를 통하여 운영비를 줄이는 것만이 선택 가능한 유일한 방안이라고 제안하였기 때문이다.

주대법원장은 아울러 판사들에게 2만1,000명에 달하는 법원 직원들의 고용 안정을 위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판사들의 월급 중 하루치를 자진 반납할 것을 제안하였다.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에서는 경제 위기마다 종종 볼 수 있는 봉급 자진 반납이 미국의 판사들에게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법원 판사들 대부분이 약 6.4%에 해당하는 봉급 반납에 동참하였으나 당당하게 이를 거부한 판사들이 있다는 점도 역시 재미있는 미국적인 현상이었다.

앨버트 맬도나도 판사는 자신에게 부여된 영장발부 업무를 지속하기 위해 법원 휴무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는 딸의 대학원 학비를 대야 하는 형편이라 봉급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형편이기도 할 뿐더러 자신은 이미 봉급의 일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지만 밑 빠진 독과 같은 주정부 재정에는 자신의 소중한 봉급을 쏟아붓고 싶지 않다고 솔직히 밝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헌법상 의회는 판사의 임기 중에 봉급을 삭감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이는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는 핵심적 조항이므로 사실상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법원 휴무조치에 따를 수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연방법원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지난해 약 64억불의 예산을 배정받았던 연방 사법부는 8.7%가 증가된 약 70억불의 예산을 청구하였다. 증가분의 86%는 물가상승 등에 따른 조정분이고 나머지 14%는 파산사건의 27% 증가에 따른 판사 및 직원 증원, 법정 정보화시설 개선 작업, 국선변호인 보수 인상, 대법원 청사 보수 등에 주로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의 연방판사들처럼 사건 하나마다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차분하게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모든 판사들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급증하고 예산의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부 주법원의 판사들에게 연방판사와 같은 수준의 재판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얼마나 양질의 재판을 하는가는 판사의 의지보다 사건의 수와 난이도, 가용 가능한 판사와 보조 직원, 법정의 숫자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오히려 많은 것 같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을 인정하고 사건의 성격에 따라 절차를 달리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 사법제도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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