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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미국에서 종신법관제가 가능한 이유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미국 연방법원 판사들은 헌법 제3조에 따라 한번 임명되면 임기나 정년이 없이 종신으로 근무한다. 경제논리로 따지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별다른 무리 없이 인사시스템이 운영되는 것은 몇 가지의 요인이 있다. 우선 연방판사가 65세에 이르고 재직기간이 15년이 넘으면 스스로 원로 판사(Senior Judge)의 지위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판사 신분과 사무실, 봉급은 그대로 유지되나, 그 자리는 법률상 공석으로 취급하여 후임 판사를 새로 임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임기제 판사(Magistrate Judge)의 적극적 활용이다. 'Magistrate Judge'는 우리에게 '예심판사' 또는 '치안판사'라고 번역되어 알려지면서 역할이나 신분에 다소 오해가 있었으나, 적어도 연방법원에서의 Magistrate Judge는 해당 법원의 필요에 따라 소속 판사들의 다수결로 임명되어 8년의 임기동안 근무하는 법원조직법상 엄연한 판사이다. 이들은 주로 형사사건의 영장 발부, 기소인부절차나 민사소송의 증거개시 등 변론준비절차를 주재하며, 경미한 형사공판이나 양 당사자가 동의하는 경우 민사 변론절차를 주재하기도 한다. 최근 법관 임용의 새로운 경향은 임기제 판사를 거친 경력자가 연방판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전체의 16%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임명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법률적 소양은 이미 검증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8년간의 실무 경험까지 더하였으니 판사직에 더 이상 적합한 후보군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미국 연방법원의 1심은 오로지 단독 재판으로 항소심은 철저히 동등한 3인 합의부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1심 판사와 항소심 판사는 전혀 별개의 신분으로 인사이동, 승진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1심 판사로 한번 임명되면 항소심 판사로 새롭게 임명되지 않는 한 단독판사로서 평생을 근무하게 된다. 항소심의 3인 합의부도 우리와 같이 경력에 차이가 나는 부장판사와 배석판사가 한 팀으로 고정되어 근무하는 형태가 아니라 사건마다 3인 합의부를 새롭게 구성하여 그 중 상서열자가 그때그때 '재판 진행을 주재한다는' 의미로 재판장을 맡는 개방적인 형태이다. 즉 1심이든 항소심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부장판사나 배석판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모든 연방판사들은 로클럭(Law clerk)을 두게 되어 있고 이들이 각 사건의 사실상 주심이 되어 기록 및 판례 검토, 메모 및 보고서 작성, 판결문 초안 작성 등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우리로 치면 각 판사별로 하나의 합의부가 따로 구성되어 운영되는 셈이다. 법률적으로는 평생 단독판사를 하지만, 실상으로 보면 평생 합의부 부장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미국의 사법부가 가장 영향력 있고 신뢰 받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몰린다는 것이다. 연방판사들의 실력과 인품은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이들을 보좌하는 로클럭들의 우수성 역시 정평이 나 있다. 하버드, 예일 등 미국 최고 로스쿨에서 학술지(Law review) 편집장이나 모의재판팀(Moot Court)을 이끌던 경력을 지닌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선호하는 첫 번째 직장이 바로 연방법원의 로클럭이다. 연방판사들은 대개 2명, 연방대법관은 4명의 로클럭을 둘 수 있는데, 임기는 보통 1년, 길어야 2년이다. 로클럭의 선발은 철저히 판사 본인의 몫이다. 판사들이 사법부의 인터넷 시스템을 통해 로클럭 선발공고를 하고, 개별적인 지원을 받은 후 자신이 직접 추천서, 인터뷰 결과 등을 검토하여 선발을 하게 되는데 자리에 따라 경쟁률이 수백 내지 수천 대 1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로클럭 취업정보 전문 사이트도 성황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자리는 역시 연방대법원 로클럭이다. 대법관 9명이 4명씩을 두고 있으므로 한 해에 36명만에게 그 기회가 주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4명이 아닌 3명의 로클럭을 둔 것으로 유명하다. 제프리 투빈은 'The Nine'이라는 책에서 그가 로클럭들과 함께 테니스 복식게임을 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항상 3명의 로클럭만을 뽑았다고 적고 있으나 지나친 억측이다. 렌퀴스트의 자서전에 의하면 매우 소박하고 인간적이었던 그는 로클럭 한사람 한사람의 선발에 매우 공을 들였고, 한번 뽑은 로클럭들과는 깊은 인간적인 교류를 갖기 원했기 때문에 3명이 가장 적절한 숫자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는 로클럭을 아이비 리그 일색으로 뽑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다만 로스쿨 학술지(Law review) 편집부 출신을 선호했는데, 이는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사고를 차분하게 구성하고 논리적으로 발전시키는 훈련을 충실히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선발된 로클럭 중의 한명이 바로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뒤를 이어 사법부 수장에 오른 존 로버츠 현 대법원장이다. 렌퀴스트 대법원장 본인 역시 잭슨 대법관의 로클럭으로 법조 인생을 시작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대개 연방법원의 로클럭들은 1년간의 임기를 마친 후 주요 로펌에 거액의 보너스를 받고 스카우트되고, 그 이후에 연방검사나 행정부, 로스쿨 교수, 로펌 파트너 등을 거쳐 다시 연방판사로 임명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들이 로펌에 가서 받는 초봉이 보너스를 제외하고도 자신들이 모시던 연방판사들의 연봉인 약 18만 내지 20만불과 비슷하거나 더 많기 때문에 판사들이 자신들의 보수에 불만을 털어놓는 것을 수차례 들은 적이 있다. 연방사법센터는 사법부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하여 로클럭들이 지켜야 할 윤리 규정들을 상세하게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고 있는데, 법관윤리강령의 대부분이 그들에게도 적용된다. 비밀 준수 의무, 언론과의 접촉 자제, 사적인 영리 추구 금지 등이 그것이다. 이런 규정에 따라 그들이 로펌으로 가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이 속했던 판사와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금지됨은 물론이다.

한편 로클럭들의 학문적 우수성은 차지하더라도 이들의 실무적 경험 부족이 문제되는 경우가 없는지 의문은 남는다. 지난 해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께서 연방대법원을 공식 방문하셨을 때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에 대하여 '복잡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정리해야 하는 사실심의 경우 실무경험이 많은 보조자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나, 오로지 법률적 쟁점에 대한 판례 조사와 이론적 검토가 필요한 상급심에서는 오히려 오랜 실무 경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하면서 '법원이 모든 일을 보좌관에게 의존하는 의회처럼 운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로 답변하는 것을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역시 어느 정도의 실무적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가치임이 분명하다. 워렌 버거 대법원장 시절부터 시작하여 현재 로버츠 대법원장에 이르기까지 연방대법관의 로클럭이 되기 위해서는 주요한 항소법원 판사의 로클럭을 먼저 거치는 것이 필수 코스로 자리 잡게 되었음은 이런 현실적인 필요성을 보여준다.

아무튼 필자는 미국의 로클럭 시스템이야말로 사법의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로클럭은 형식적으로 법원에 단기간 고용된 비정규직 공무원이다.

하지만 때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나아가 멘토와 문하생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대등한 법률가 대 법률가로서 자신의 법률적 견해를 당당하게 제시하여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물론 판사가 로클럭의 의견을 합당치 않다고 여긴다면 전혀 구속될 필요도 없다. 로클럭의 의견은 판사의 견해를 보다 확고하게 검증해 주는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또한 판사가 로클럭에게 어떤 일을 맡기는가는 전적으로 판사의 권한이며, 내려진 결정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로지 판사에게만 돌아간다. 로클럭 제도는 이러한 복잡 다양한 인간 관계의 모든 측면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현재 우리의 합의부는 법관의 독립이라는 이상과 법관의 교육 및 양성이라는 현실적 필요 사이에서 타협한 부자연스런 제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체임버(Chamber)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불리는 연방판사들의 집무실에 가보면 방 한편에 놓인 탁자 위에 가족사진이 담긴 수많은 액자들이 촘촘히 세워져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개 자신의 로클럭 출신들이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아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보내온 가족사진들이다. 자신이 모시는 판사의 역대 로클럭들 전체가 모이는 송년 모임을 해마다 주선하는 것은 우리로 치면 우배석인 현직 고참 로클럭의 중요한 임무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판사는 자신의 로클럭이 임기를 마치고 나갈 때마다 미국 헌법이 인쇄된 소책자에 서명을 하여 나누어준다. 법조인으로서 항상 헌법 정신을 잊지 말라는 뜻이란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돌아가셨을 때 연방대법원에서 그의 시신을 운구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한 7명의 전직 로클럭들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얼마나 그 관계의 본질에 맞는 이름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가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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