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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9.11. 테러범에게도 재판이 필요한가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지난 11월13일, 에릭 홀더 법무부장관은 뉴욕 9.11. 테러사건의 주모자로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되어 온 칼리드 쉐이크 모하매드와 공범 4명을 테러의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뉴욕 남부 연방법원에 기소한다고 전격 발표하였다. 사건 발생 후 무려 8년 만의 기소 결정이다. 우리 정서로는 그런 종류의 사건은 속전속결로 수사가 이루어지고 재판도 논란 없이 신속하게 끝났어야 국민들이 만족했을 터인데 8년 만에 기소를 한다니 그들의 인내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소가 지연된 것은 8년 동안 신중한 수사를 하기 위한 것보다는 애당초 부시 행정부가 테러범들로 하여금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사건 이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수행 과정에서 알카에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체포하여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수용해 왔다. 미국 의회는 행정부가 전쟁에 필요하다고 스스로 판단되면 어떠한 초법적 조치도 취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주었고, 이 법에 따라 관타나모 수용자들은 영장이나 재판없이 무기한의 구금 상태에 놓여졌다. 이들에게는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는 전쟁포로도 아니고, 미국 헌법의 보호를 받는 형사 피고인도 아닌 '적군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모호한 신분이 부여되었다. 애당초 전쟁 포로의 신분을 부여하지 아니한 것은 제네바 협약상 포로에게는 조사를 위한 신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이성을 찾게 되면서 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법치주의 이슈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물고문과 같은 가혹행위가 법무부의 유권해석하에 적법하게 자행되고 있고, 테러범과 무관한 수용자들도 상당수 있다는 소식 등이 외부에 알려졌다. 결국 수용자들은 인권단체의 변호사들을 통하여 미국의 연방법원에 구금상태의 적법성을 판단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최종 결정권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당시 연방대법원에서 열린 구술변론에서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법무부 간부는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 미국은 전쟁 중입니다"라는 말로 무겁게 변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변론은 곧 본질적인 질문에 가로막혔다. 2차대전 참전용사로 애국심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는 스티븐스 대법관은 "만약 전쟁이 이미 끝난 상태라고 가정하더라도, 이들을 관타나모 기지에 무기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전쟁 중이냐 아니냐가 이 사건의 법률적 본질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사건에 대한 시각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결국 연방대법원은 2003년부터 관타나모 수용자들의 권리를 점차 넓혀가는 판결들(Rasul v. Bush, Hamdi v. Rumsfeld)을 내리기 시작하여 지난 2008년에는 최종적으로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되어 있는 모든 외국인도 미국 헌법에 따라 인신보호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리기에 이른다(Boumediene v. Bush). 이 판결은 첨예한 대립 끝에 중도파인 케네디 대법관이 진보진영에 가세함으로써 5:4의 근소한 차이로 결론이 내려졌다. 치열한 대선과정에서 내려진 이 판결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매우 컸다. 맥케인 후보 진영에서는 이 판결을 비난하면서 '보수주의 판사 임명'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울 정도였다.

결국 오바마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첫 번째로 서명을 한 행정명령이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이내에 폐쇄하겠다"는 것임을 보면 이 이슈가 미국 사회에서 갖는 정치적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과거 추구해 왔던 '인권과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부시 행정부 시절 전쟁을 거치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보고,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국의 국격을 바로 세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권을 잡고 보니 관타나모 기지의 1년 이내 폐쇄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날이 갈수록 꼬여갔다. 그도 이상과 현실이 가깝지 않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관타나모 수용자들 중 가장 죄질이 나쁜 핵심인물들을 뉴욕 연방법원에 기소하는 정공법을 통해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지며 '원칙 준수'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에릭 홀더 법무부장관은 "지난 200년 동안, 우리 사회는 피고인에게 적법절차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보장해 왔고, 피해자들도 이를 신뢰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번에도 사법시스템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으로 우리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합니다. 우리 검사들도 반드시 테러범들이 적법한 재판을 거쳐 법정 최고형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공소 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기소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그 동안 법무부장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연방검사, 정보기관, 법원경비대 등과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피고인들의 이동 경로, 법원 인근의 안전한 수용시설 여부, 법원 청사의 경비 적합성, 판사와 증인들의 경호 문제, 그리고 재판이 갖는 상징성 등 모든 문제를 심도 있게 고려한 결과 뉴욕 남부 연방법원이 최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당장 보수진영과 뉴욕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상원 법사위는 곧바로 법무부장관을 출석시켜 기소의 당위성을 따졌다. 우선 9.11. 테러범은 단순한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므로 이들을 군사법정이 아닌 민간 법원에 기소하는 것 자체가 숭고한 전쟁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본질론으로부터 시작하여, 테러범들이 뉴욕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뉴욕이 테러의 목표로 급부상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우려가 제기되었다. 법사위 회의장에는 9.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유족이 아들 사진을 가슴에 달고 나와 법무부장관에게 항의하는 모습도 보였다.

무엇보다도 막상 기소가 이루어지면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쏟아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의 증거자료가 엄청나기 때문에 공판 전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절차에만 최소 2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배심원 재판이 열릴 경우 증인 신문에만도 엄청난 시일이 소요될 것이며, 장시간의 재판 동안 배심원과 증인 그리고 판사의 신변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과연 누가 변호인을 맡을 것인지, 증거조사 과정에서 각종 군사기밀의 유출을 막을 수 있는지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피고인들이 무죄를 주장하면서 법정을 자신의 정치적 선전장으로 희화화 시킬 경우에 과연 국민들이 이를 지켜보면서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가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나아가 피고인이 CIA 비밀 구치소에서 3년간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고, 183 차례의 물고문을 당했다는 자료에 비추어 중요 증거들이 위법수집 증거로서 배제되고 테러범들이 무죄평결을 받는 최악의 사태가 올 경우에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느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물론 법무부가 이러한 우려에 대한 충분한 사전 검토나 대비책 없이 함부로 연방법원에 기소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통계적으로 9.11. 테러 이후 뉴욕연방검찰청이 기소한 테러사건 중 94%가 유죄 판결을 받았고, 미국 본토에서 이루어진 테러사건에 대해서는 100% 유죄 판결이 나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세간의 우려와 달리 피고인들이 첫 기일에 유죄를 인정하고 재판이 싱겁게 끝나버릴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 재판이 던져주는 '적법절차의 준수'라는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비용을 감수할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은 어떤 경우에든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에게 오랫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필자도 이성적으로는 쉽게 답할 수 있겠지만 판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재판을 실제로 담당하여야 할 뉴욕 연방법원의 판사와 배심원, 재판 종사자들이 겪어야 할 부담과 고초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연민의 정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법과 원칙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며, 때로는 위험할 때도 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선의가 악의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 홀더 법무부장관이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사법부는 지난 200년 동안 법과 원칙을 지키는 데 흔들림이 없었고 그로 인해 지금의 신뢰받는 사법부를 만들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나본 미국의 판사들은 법대로 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당당하다. 그 배경에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세 가지의 인프라가 있다. 하나는 판사의 철저한 신분 보장이고, 또 하나는 판사가 재판절차에서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에 대한 완벽한 지원시스템이며, 마지막으로 그런 모든 불편함을 참고 기다려주는 사회적 인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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