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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스티븐스 상원의원 재판이 남긴 것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85세의 테드 스티븐스(Theo-dore Stevens)는 정치인으로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1968년 알래스카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처음 선출되어 40년에 걸쳐 재선에 성공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다선 공화당 상원의원의 기록을 세웠고, 재직기간 대부분 상원 원내대표, 예산위원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최고의 영향력을 과시해 왔다. 그러나 수십 년간 쌓아온 명성이 무너지는 데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2008년 여름 검찰은 그가 지난 수년 동안 알래스카에 기반을 둔 석유기업으로부터 안마의자를 비롯한 각종 선물과 집 무상 수리 혜택 등 25만불 상당을 몰래 수수하고 고의로 재산공개에서 누락하였다는 혐의로 기소하였기 때문이다.

스티븐스 상원의원은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하였고 DC 연방지방법원의 설리번(Emmet Sullivan) 판사 주재로 배심재판이 시작되었다. 스티븐스 상원의원은 노련한 정치인답게 신속한 재판을 통해 선거 전에 자신의 결백을 밝혀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그렇게 쉽게 끝날 재판은 아니었다. 사건의 성격상 재판은 진실게임으로 치달으며 이전투구의 모습을 드러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증언을 위해 워싱턴에 머물던 증인을 법원 몰래 알래스카로 돌려보낸 사실과 피고인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은 증거물을 변호인측에 공개하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변호인은 증거개시절차 위반을 들어 재판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재판장도 수차 경고를 하였으나, 검찰은 증인을 돌려보낸 것은 그가 아팠기 때문이고 불리한 증거를 공개하지 않은 것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실수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논란 끝에 2008년 10월 배심원단은 결국 유죄평결을 내렸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언론은 “Chair(안마의자)가 Chair(위원장)을 잡았다”고 꼬집었다. 스티븐스는 항소의사를 밝히면서 11월에 실시된 선거에 출마하는 의지를 보였으나 결국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2009년 2월 선고기일을 앞두고 FBI 수사관 한사람이 양심선언을 하고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는 검찰과 FBI 수사관들이 공모하여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들을 의도적으로 숨겨왔고, 증인을 귀향시킨 것도 예행연습 과정에서 검찰에 불리한 증언을 하리라는 것이 드러나자 증언을 막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였다고 폭로했다. 심지어는 검찰에 협조하는 대가로 선처를 약속받은 핵심증인인 석유회사 대표와 FBI 여성수사관이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고, FBI 수사관 중 일부는 그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친지들의 취업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설리번 판사는 즉시 진상조사를 위한 심문기일을 열었다. 언론은 판사가 ‘격노’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는 자신이 증거개시를 명한 것은 “친절을 베풀도록 요청한 것”이 아니라 “법원의 명령”이었다면서 공판에 관여한 검사 6명에게 법정모욕 혐의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2007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주법원에서 거짓말한 검사를 하루 동안 구류에 처한 사례가 있지만, 연방검사를 법정모욕으로 처벌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오바마 대통령이 선출되고, 에릭 홀더가 법무부장관으로 부임하면서 검찰의 분위기는 급변하였다. 에릭 홀더 법무부장관은 검사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이 사건에 관련된 검사 전원을 교체하고, 재판부에는 이 사건의 공소제기가 편견에 기초한 것으로서 위법하므로 평결을 무효로 해달라는 신청을 제출하는 초강수를 선택하였다. 에릭 홀더 법무부장관은 이 사건을 통해 부시 행정부 시절 누적되어 온 불법적인 수사관행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계기로 삼고, 자신의 재직 중 검사들의 비행에 대해서는 절대 관용이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도 올해 4월에 열린 미국연방법원장 회의에 참석하여 에릭 홀더 법무부장관이 자신의 재임 중 스티븐스 재판과 같은 사례는 없을 것임을 다짐하면서 법원장들에게 검사들의 비행을 발견하면 자신에게 바로 연락해 달라고 자신의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바가 있다.

결국 설리번 판사는 올해 4월 법무부장관의 신청을 받아들여 유죄평결을 무효화하고 공소를 기각하는 한편, 외부의 변호사를 특별검사로 임명하여 검사들에 대한 법정모욕 절차개시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진상조사를 진행 중이다. 통상 이런 경우에도 법무부 내부에서 진상조사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설리번 판사는 “이 사건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난 정부의 행태에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정부의 진상조사를 믿을 수 없다”면서 “25년의 판사생활 동안 이렇게 심각한 비행은 처음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에 더 주목한다. 설리번 판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이 디스커버리 절차를 규정한 연방형사소송규칙 제16조가 불명확한데서 기인한다고 보고, 연방사법회의 산하의 소송규칙 위원회(Rules Committee)에 피고인에게 유리한 모든 증거의 공개의무를 명문화하는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마침 필자는 지난 8월 이태운 서울고등법원장님 등을 모시고 DC연방지방법원을 방문하였다가 로버츠 판사(Richard Roberts)를 만나 이 개정안에 대한 배경설명을 들은 바 있다. 그는 현재도 증거공개 의무를 위반한 검사에 대해서 법정모욕으로 처벌하거나 변호사 징계절차를 통하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는 등의 간접적인 제재가 가능하고 판례법(Brady vs. Maryland, Giglio vs. United States)으로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주요 증거나 유죄를 탄핵할 증거를 공개하지 아니한 경우 헌법상 적법절차를 위반한 것으로 보아 공소를 기각하는 제재가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연방형사소송규칙에는 이러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논란이 있기 때문에 브래디 판결을 명문화하는 개정안을 제기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참고로 미국에는 의회가 제정한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이 따로 없고 사법부가 정한 연방민사소송규칙, 연방형사소송규칙이 사실상 소송법으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은 미국 의회가 1934년에 이른바 「규칙제정 수권법(Rules Enabling Act)」을 만들어 연방대법원에 소송 절차 및 제도에 관한 광범위한 규칙제정권을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소송규칙에 대한 개정 의견이 제출되면 자문위원회의 검토와 6개월 동안의 다양한 의견을 조회하는 공람절차를 거친 후 규칙위원회, 연방사법회의, 연방대법원의 순차 결의를 거쳐 의회에 송부한다. 의회가 규칙안 접수 이후 7개월 동안 이에 반하는 별도의 법률안을 제정하지 아니하면 그 규칙은 그해 12월1일부터 자동으로 법률에 준하는 효력을 발생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법률에 따라 연방사법회의 산하 형사소송규칙 자문위원회는 지난 2009년 9월 시애틀에서 회의를 열어 설리번 판사의 개정안에 대한 첫 번째 논의를 시작했다. 법무부를 대표하여 위원회에 참석한 래니 브로이어 형사국장은 연방형사소송규칙 제16조 개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대안으로서 검사들에 대한 증거개시 교육 의무화, 과학수사기법 연구강화, 사건관리 프로그램 도입, 각 검찰청마다 배치된 디스커버리 전문검사를 통한 지도 감독 등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내부 감사를 통해 2000년 이후 디스커버리 관련 문제가 제기되었던 사건 107건을 조사한 결과 검사가 법규를 위반한 것은 15건에 불과했다면서 그 기간 동안에 68만건의 기소가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검사들의 디스커버리 위반 문제는 일반적 관행이기보다는 개인적 실수에 기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옹호했다. 연방사법회의 형사소송규칙 자문위원회는 내년 4월에 다시 회의를 열어 설리번 판사의 개정안을 6개월간의 의견공람 절차에 회부할 것인지에 대한 표결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느 나라나 재판을 하다보면 제도의 오류나 인간의 실수로 인해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한때의 호들갑으로 끝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발에 오줌누기식 미봉책이 아닌 진정한 해결책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기다려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이 일을 최고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도 중요하다. 의원들 손으로 직접 소송법을 만드는 대신 소송절차에 대한 최고 전문가인 사법부에 규칙제정권을 선뜻 넘겨준 75년전 미국 의회의 혜안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