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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유난히 바빴던 연방대법원의 여름나기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미국 연방 지방법원들은 1심 법원의 특성상 우리나라처럼 하계 휴정기를 일률적으로 지정하지 않지만, 연방판사들이 대체로 긴 여름휴가를 가는 편이라 7·8월에는 법원 전체가 한산하게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필자가 궁금하여 연방판사에게 직접 물어보니 법정 휴가일수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각자 재판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율적으로 휴가를 갈 수 있으나, 실제로는 밀려있는 재판 업무 때문에 1년에 약 3주 정도의 휴가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동등한 경력의 판사 3인으로 구성된 합의부가 철저히 법률적 쟁점에 관하여만 심리하는 연방 항소법원의 경우는 좀 더 여유가 있는 편이다. 법원마다 사정은 다르나 DC 연방항소법원의 경우는 약 2달간의 하계 휴정기를 거쳐 9월14일부터 재판을 시작하며, Federal Circuit 항소법원의 경우는 일 년 내내 매달 첫 번째 주에만 몰아서 변론을 열고 나머지 3주간은 기록검토 및 판결작성에 집중하는 특이한 시스템이다.

연방대법원은 매년 10월 첫째 월요일부터 변론을 시작하여 다음해 6월말에 개정기를 마치는 것이 관례이다. 여름 석 달 동안은 대법원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대법정 시설을 개보수하고, 변론기일이 지정되어 있는 사건기록과 상고허가를 기다리는 1만여건의 사건기록을 검토하는 등 나름대로 한가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만 올해의 경우는 극히 예외적으로 연방대법원이 밖에서 보기에도 매우 바쁜 여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취임이고, 두 번째 이유는 특별기일 재판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 소토마요르대법관 취임 - 특별기일 재판도 열려

미국의 대법관이 되려면 상원 인준을 거친 후에 두 차례의 선서를 마쳐야 한다. 첫째는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보듯이 모든 연방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헌법상 선서(Constitutional Oath)이고, 둘째는 법원조직법에 따라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공정하고 불편부당하게 판사로서의 직무를 다하겠다는 법관 고유의 선서(Judicial Oath)이다. 헌법상 선서는 1940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프랭크 머피(Frank Murphy) 대법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대통령 참관 하에 실시한 이래 현재까지 그 관례가 이어져 오고 있고, 이 장면은 언론을 통하여 공개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하다. 반면에 주로 연방대법원내 회의실이나 대법정에서 비공개로 실시되는 법관 취임선서는 대법원 내부행사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대법원의 과거 관례에 따라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최대한 빨리 대법관 직무에 돌입하기 위해 상원인준이 통과된 바로 다음날인 2009년 8월8일,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연방대법원 회의실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의 주관 하에 두 가지 선서를 동시에 실시하였고 대법원은 역사상 최초로 대법원내 선서식 장면을 TV로 생중계하였다. 이는 대법원의 대언론정책이 과거와 달리 개방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신임 대법관은 위의 두 가지 선서를 마치면 법률적으로는 곧바로 직무수행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첫 재판을 앞두고 연방대법원 대법정에서 가족과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통 방식에 따른 취임의식(investiture ceremony)을 갖는 것으로 공식적인 업무수행을 개시한다. 대법관의 이러한 취임의식에는 대통령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것이 아름다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연방대법원의 대법정에는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대통령이 앉는 귀빈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통에 따라 소토마요르 대법관도 지난 9월8일 연방대법원 대법정에서 오바마 대통령, 바이든 부통령, 자신을 지지했던 상원의원, 대법관, 항소법원의 동료 법관, 그리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취임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19세기초 미국 대법원의 초석을 놓았던 존 마샬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가죽의자에 앉았다. 긴스버그 대법관이 선물한 하얀 레이스 컬러 위에 검은 법복을 입은 그녀는 지난 100년 동안 재직했던 모든 연방대법관들의 서명이 담긴 성경 위에 손을 얹고 로버츠 대법원장의 주관으로 법관 취임선서를 실시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들과 밝은 표정으로 환담을 나누며 축하해 주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이어서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관례에 따라 대법원 청사앞에서 기다리는 취재진을 위해 로버츠 대법원장과 함께 담소하면서 연방대법원 대리석 계단을 나란히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연출하고 한 동안 포즈를 취해 주었다.

미국 대법관의 서열은 매우 엄격하다. 대법관들의 서열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대법관에 취임한 순서로 정해지는데 공식행사에서 서열 순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대법정의 좌석은 대법원장이 중앙에 앉고 그 바로 우측에 최선임 대법관, 좌측에 차선임 대법관이 앉는 방식으로 순차 돌아가서 가장 최근에 임명된 대법관이 좌측 끝에 앉게 된다. 우스갯소리로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취임을 가장 반기는 것은 얼마 전까지 말석을 지켰던 얼리토 대법관이라고 한다. 최근 방영된 인터뷰에 의하면, 직원 여부를 막론하고 대법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출입이 금지되는 합의실에서 신임 대법관은 외부의 노크 소리에 가장 먼저 일어나 응대해야 하며 합의 결과에 대한 공식 기록을 만들어야 하는 등 말석으로 궂은 일을 맡아야 한다. 아울러 합의시 상서열자부터 의견을 밝히는 관례에 따라 신임 대법관은 마지막에 발언 순서가 돌아오는데 이때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태이거나, 자신의 투표결과에 따라 결론이 정해지는 부담스런 상황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의식도 의식이지만, 역시 대법원의 존재 이유는 재판에 있다. 상원이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인준을 8월7일에 처리해 주고, 취임식도 통상적인 10월초가 아닌 9월8일에 앞당겨 열게 된 것은 대법원이 이미 9월9일 이례적인 특별기일을 잡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면에서 유례가 없는 특별대우를 받은 이 사건은 바로 지난 2002년 맥케인과 파인골드 상원의원이 주도하여 만든 초당적 선거운동 개혁법(Bipartisan Campaign Reform Act)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지난 2009년 3월 이미 이 사건에 대한 구술변론을 마쳤음에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2010년에 있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선거법의 조속한 확정을 위해 휴정기에 다시 구술변론을 열기에 이른 것이다.

◇ 선거개혁법 위헌여부 판단 - 前하버드 법대학장 첫 변론

지난 200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시민연대(Citizens United)’라는 보수 정치단체가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힐러리 클린턴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 영화 ‘힐러리(Hillary: The Movie)’를 만들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려고 하자 연방선거관리위원회는 위 영화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선거운동용 홍보영상이라는 이유로 방영을 금지하였다. 위 법은 금권선거 방지를 위하여 선거를 60일 앞둔 시기부터는 기업의 후원금을 이용한 선거운동용 홍보영상의 전송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고인을 포함한 보수진영은 위 법이 헌법이 보장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피상고인을 포함한 진보진영은 기업자금을 이용한 선거운동에 일정한 제한을 가함으로써 혼탁한 금권선거를 방지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대체로 보수적인 입장이 우세한 분위기이나 이미 연방대법원이 두 차례에 걸쳐 유사한 쟁점에 관한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어 위헌 의견을 내려면 선례 존중의 원칙을 비켜가야 한다는 점이 대법관들에게는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위 법안을 주도했던 맥케인 상원의원은 이날 재판 방청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열어 로버츠 대법원장이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법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확립된 선례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제 와서 청문회 당시의 약속과 모순되는 행동을 한다면 민주주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재판은 여러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첫째 시기적으로 하계 휴정기에 열렸다는 점, 둘째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취임 후 첫 구술변론이라는 점, 셋째 오바마 행정부에서 법률상 국가를 대리하는 최고 변호사인 법무부 송무차관(Solicitor General)으로 임명된 엘리나 케이건(Elena Kagan) 전 하버드 법대 학장이 직접 구술변론에 나선 첫 케이스라는 점, 넷째 상고인 대리인을 부시 행정부의 송무차관이었던 올슨(Theodore Olson)이 맡고, 피상고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의견서(Brief of Amicus Curiae)를 제출한 맥케인 상원의원을 대리하여 클린턴 행정부의 송무차관이었던 왁스만(Seth Waxman)이 변론에 가세하는 등 3대 정권의 송무차관(Solicitor General)들이 한 법정에서 불꽃 튀는 변론 대결을 벌였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 결론이 주목된다.

흔히들 미국을 격식과 서열이 파괴된 자유분방한 나라로 생각하지만, 적어도 사법부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과거의 전통과 격식을 지켜가려는 모습은 그 자체로서 국민의 관심을 끄는 뉴스가 되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는 은연중에 법원이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법원칙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임을 각인시켜 준다. 그 중에서도 역시 최고의 드라마는 대법원의 공개 구술변론임이 분명하다. 미국의 사법부가 갖는 권위와 국민의 신뢰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 즉 결론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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