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독자마당, 수필, 기타

뉴욕의 서울시민

주광일 변호사(前 국민고충처리위원장)

2009년 7월. 나는 뉴욕(New York)에 있었다. 3주간 남짓, 직장생활을 하는 막내딸의 단칸아파트에서 지내며 여름 한 철을 보낸 것이다. 뉴욕 일대에 친구, 친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아내와 딸과 셋이서만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치 피정(避靜)을 하는 것과 같은 나날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혼자서 성(聖)프란시스코 성당에 걸어가서 새벽미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사 마시고…. 그리고 평일 아침에는 딸애의 사무실이 있는 파크 애비뉴(Park Avenue)까지 셋이 함께 걸어갔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 시차 때문에 졸리면 잠깐 눈을 붙이고 잠이 깨면 보더스(Borders)나 반스 앤 노블(Barnes & Noble)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하고, 마음에 드는 책들은 사서 읽고, 책을 읽다 지치면 메이시(Macy’s) 백화점에 가서 아이쇼핑을 하고…. 그렇게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보냈다. 단칸방에서의 피난살이 같은 고단하고도 단조로운 일상이었지만 행복했다.

뉴욕은 여전했다. 길거리를 메우는 수많은 사람들, 드높은 빌딩들. 모든 것이 변함이 없었다.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 같은 뉴욕의 길거리. 사실 뉴욕 시내에 가보면 영어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또 뉴욕의 번화가에서는 누가 뉴요커(New Yorker)인지 관광객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뉴요커든 관광객이든 뉴욕(NY) 모자를 쓰고 있거나 “나는 뉴욕을 사랑합니다(I love NY)”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서울시민으로서 외국인 방문객 신분으로 뉴욕에 도착했지만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그 사실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뉴욕은 그런 점에서 전세계의 여느 대도시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있었다. 전세계로부터 밀려드는 관광객들이 이방인의 심정으로 뉴욕에 와서 지내다가 떠날 때는 또 한 사람의 뉴요커가 되어 돌아가는 듯 보였다. 뉴욕의 길거리가 전 세계로부터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이유는 바로 뉴욕만이 가지고 있는 개방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이방인들만의 도시같이 보일 정도의 개방성·관용성 때문에 뉴욕으로 뉴욕으로 지구촌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번 여름의 뉴욕 방문은 5개월 만이었다. 딸아이가 2년 전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뉴욕에서 취직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는 탓에 우리 내외가 1년에 한두 번씩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몇 달 사이에 맨해튼 거리에는 작지만 아주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브로드웨이 34번가에 있는 헤럴드 스퀘어(Herold Square)부터 관광객의 명소인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까지 자동차가 없는 이른바 보행자천국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자동차 통행만을 금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넓은 거리에 의자와 파라솔들을 배치해 놓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 한복판에 앉아 쉬고… 걷고… 또 새로이 만들어 놓은 자전거도로에는 자전거가 달리고. 마치 한마당 축제가 열린 것 같았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넘치는 인파, 누가 뉴요커인지 아니면 나 같은 이방인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뉴욕이 더욱더 나와 같은 이방인들을 위한 도시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어떻든 이번 뉴욕 방문기간 동안 아무도 나를 알아 볼 사람도 없고, 또 나 자신 아무도 나를 알아주길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의 마음은 늘 평화로웠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뉴욕 거리의 인파 속에서 나는 오히려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있는 듯한 더 나아가 무인도(無人島)에 있는 듯 한 생각에 빠져들고는 했다. 어쩌면 나에게는 과분한 상상이지만 군중 속의 고독을 담담히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수도자(修道者)가 된 마음이었다.

2009년 8월15일 광복절.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 13일이 지났다. 그런데도 나는 문득 문득 나날이 축제 같았던 타임스 스퀘어가, 헤럴드 스퀘어가 생각난다. 2009년 7월19일 정오, 메이시 백화점 앞 헤럴드 스퀘어 길거리에 마련된 의자에 나의 가족 셋이 앉아 핫도그로 점심을 때우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던 때, 나는 마치 내가 뉴요커가 된 것 같은 상념에 젖어들었었다. 광복 64주년을 맞아 우리 대한민국 서울도 세계각국으로부터 밀려드는 외국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그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편안히 지내다가 서울을 떠날 때면 ‘서울시민’이 돼서 다시 서울에 돌아올 생각을 했으면 싶다.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