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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첫 번째 히스패닉계 여성 대법관의 탄생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5월26일 아침 백악관 이스트룸에 키가 작고 검은 머리를 가진 히스패닉 여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미국인들에게 낯설고 발음도 특이한 성을 가진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출신 여성이 미국 역사상 첫 연방대법관 후보로 지명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상기된 표정의 소니야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 판사와 함께 단상에 선 오바마 대통령은 자못 긴장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저도 매우 떨리는군요”라는 말로 웃음을 이끌어낸 뒤, 그녀를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한 이유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그는 대법관이 되기 위한 요건으로 첫째, 어떤 복잡한 법률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정확한 법률지식과 둘째, 판사의 역할은 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라는 사법권의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정치적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공정함을 추구하며 선례를 존중하고 사실관계에 입각하여 법률을 충실하게 적용하는 자질을 우선 고려하였다고 밝혔다. 여기까지는 특별히 오바마답지 않은 모범답안이다.

그는 나아가 이 두 가지 요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법의 생명은 논리에 있지 않고 경험에 있다”는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벽을 직접 극복해 본 경험이 있어야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고 그들과 공감할 수 있다며, 대법관은 이런 자질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그는 인선 과정에서 상원 법사위 위원 전원을 포함한 의회의 양당 지도자들과 헌법학자들, 변호사단체 등의 의견들을 두루 수렴하였으며 그 결과 소니야 소토마요르를 대법관으로 지명하기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1992년 공화당 출신인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게 뉴욕 남부지구 연방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고, 1998년에는 민주당 출신인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방 제2구역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되는 등 양당의 고른 지지를 받았고, 그 이전에는 검사와 기업법 변호사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특히 수터 대법관이 연방대법원에서 유일하게 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사실심을 다루어본 경험이 있음을 고려할 때, 약 7년간 지방법원 판사로서 사실심을 다루어본 그녀가 수터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녀가 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내린 450여건의 판결 중에서 자신을 포함한 미국인들의 가장 관심을 끌었던 사건은 1994년 메이저리그 파업 당시 파업중단을 명하는 임시조치를 내렸던 사건이라면서, 그녀가 메이저리그를 살린 장본인이라고 말하여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녀의 법조인으로서의 화려한 경력 뒤에 힘들었던 삶의 궤적도 매우 소중한 자산임을 빼놓지 않았다. 이미 국내 언론을 통해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토마요르 판사는 9살 때 초등학교 중퇴 학력인 노동자 아버지를 여의고 뉴욕 브롱스의 빈민가에서 간호사인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어릴적부터 당뇨병을 달고 살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택에 공부에 매진하여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거쳐 판사가 되었고, 남동생은 외과의사로 성공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더욱이 그녀가 이미 많은 것들을 성취했음에도 자신의 인생이 시작한 자리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최고법원의 판사가 된다면 미국이 대법원 청사 전면에 새겨진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한걸음을 더 내딛는 것이라면서, 이미 두 차례 그녀를 인준해준 상원이 이번에도 신속한 인준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소개를 받고 발언대에 선 소토마요르 판사는 북받히는 감정을 참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일일이 전하면서, 특히 어머니 셀리나 소토마요르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은 있을 수 없었으며 자신은 어머니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사람이라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풍요로운 삶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경험이 대법관으로서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가족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광경을 바라보는 노모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찡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대법관 지명절차는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대통령 선거 못지않게 고도로 정치적이다. 뛰어난 법률가로 정평이 난 다이안 우드 판사와 엘레나 케이건 법무부 송무차관(solicitor general)을 제쳐두고 역사상 첫 히스패닉계 출신인 그녀를 선택한 것을 두고,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에 매우 풀기 어려운 정치적 방정식을 던져주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공화당이 상원 인준 과정에서 소토마요르 판사를 강하게 공격할 경우 미국에서 이미 흑인보다 수가 더 많아진 히스패닉 유권자와 여성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할 우려가 있는 반면, 은근슬쩍 인준에 동의해줄 경우 종래의 공화당 지지층의 사기를 저하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해석하자면 공화당에 이른바 ‘산토끼와 집토끼의 딜레마’를 던져 놓은 것이다.
공화당은 평소와 달리 당장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으나, 보수 진영에서는 그녀가 어느 컨퍼런스에서 ‘항소법원은 정책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말한 것이 그녀의 사법적극주의적 사법철학을 보여주고 있다거나, 그녀가 “성별과 인종에 따라 판결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서 “히스패닉 여성이 그러한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백인 남성보다 종종 더 좋은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고 발언한 사실과 백인 소방대원들이 제기한 차별금지 소송에서 역차별(affirmative action)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던 점을 들어 인준에 반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상원에서도 헌법이 보장한 적법한 검증 절차를 수행함에 있어 인종적 이유로 관대해져서는 안 되며, ‘법 앞의 평등’ 못지않게 ‘청문회에서의 평등’도 지켜져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힘을 얻어가면서 공화당 개별 의원들로부터 강경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발표 당일 저녁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해리 리드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의 선거자금 모금행사에 직접 참석하여 마치 대선과정을 연상하게 하는 강한 웅변조 연설로 소토마요르 대법관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것도 우리 시각으로 보면 다소 이례적이다. 입장권이 무려 1인당 2,400달러인 이 행사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덕분에 성황을 이루어 수백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손쉽게 모금해 주는 데 성공했다. 인준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할 상원 원내대표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정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소토마요르 판사는 내주 중 상원 양당 원내대표를 직접 예방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으로 대법관 후보자로서의 공식 업무를 시작한다. 청문회를 담당할 상원 법사위원 전원을 일일이 찾아 인사한 후 청문회까지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백악관에서는 8월7일까지 상원의 인준을 통과한다는 목표아래 74일 동안 벌어질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모두 준비하고 이에 따라 예정된 수순을 밟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후보자 지명발표 과정에서 법률적인 측면보다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집중 부각시킨 것도 고도로 계산된 여론선점 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필자는 운 좋게도 미국의 대법관 지명절차를 현장에서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현재 모든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대법관 인준에 쏠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후원을 거쳐 인준을 통과한 미국의 대법관들이 과연 취임 이후 인준 과정의 정치적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미국의 대법관들이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받는 관심은 권위와 영향력의 반증이라는 면에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사법부가 국민들로부터 받는 지나친 관심을 즐기는 순간 사법부의 위기도 시작된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