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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헤이그통신] (19) 스스로 변호할 권리

권오곤 UN ICTY 재판관

Ⅰ. 글머리에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는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기본적 인권으로, 범세계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차원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거부하고 변호인 없이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 즉 스스로 변호할 권리가 문제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법조인이 아닌 피고인은 절차법 및 실체법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어 적절한 방어를 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건강상의 이유로 절차가 지연될 수 있고 피고인이 재판절차에 협조하지 않거나 이를 방해하는 경우에 윤리규범의 구속을 받는 변호사와는 달리 마땅한 제재방법이 없어 절차 진행상 곤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국제형사재판의 실무에서는 일부 정치적 인물들이 재판절차를 자신의 유무죄와 관련한 방어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선전 기회로 삼고자 하는 목적에서 마치 유행과도 같이 ‘자기변호(self-repre sentation)’를 선호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고, 이에 따라 피고인의 권리와 신속한 재판의 이상을 적절히 조화하는 선에서 그 한계를 규명하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Ⅱ. 기본권으로서의 자기변호권

피고인이 변호인 없이 스스로 방어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권리는 일부 대륙법 국가에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영미법계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변호인의 도움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피고인의 진정한 의사에 반하여 변호인에 의한 변호가 강제된다면 변호인이 피고인의 조력자가 아닌 지배자가 되어 피고인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Faretta v. California).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관한 기본적인 권리장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기본 협약(International Covenant for Civil and Political Rights, ICCPR)’ 제14조도, 피고인 자신이 선택하는 변호인에 의한 변호를 받을 권리와 더불어 ‘피고인 스스로 직접 방어(defend himself in person)’ 할 수 있는 권리도 형사재판제도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보장 중의 하나로 선언하고 있고 ICTY를 비롯한 여러 국제재판소도 이와 궤를 같이하여 이러한 ‘자기변호권(right to self-representation)’을 인정하고 있다.

Ⅲ. ICTY의 실무례

1.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및 유고연방의 대통령이었던 밀로셰비치(Milosevic)는 ICTY는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재판소’이기 때문에 그 재판을 위하여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도 자신만큼 사안을 잘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변호인 선임을 거부하고 스스로 재판을 받았다. 다만 재판부에서는 3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Amicus Curiae(법원의 친구)를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피고인을 위하여 정당한 법적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후견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나 증인 신문 등의 재판 진행은 피고인이 진행하고 이들은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 후 피고인측 증거조사(defense case)의 단계에 이르러 피고인의 건강이 악화되고 이로 인하여 재판절차가 중단되는 일도 잦아지게 되자, 피고인으로 하여금 자기변호를 계속 허용하는 것은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게 하는 것으로서 자기 변호권이 피고인의 기본적 권리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해할 정도에 이르는 경우에는, 이를 제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재판부 직권으로 종전의 Amicus Curiae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이들로 하여금 증인신문 등 재판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도록 하고 피고인은 보충적 범위에서만 참여하도록 하였다(위 변호인은 그 당시 피고인으로부터 사건에 관한 지침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변론을 계속하는 것은 법조윤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국인 영국의 변호사협회 윤리위원회의 자문을 거친 후 사임신청을 하였는데, 재판부에서는 변호인의 판단으로 일반적인 피고인의 이익을 위하여 재판진행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그러자 피고인측 증인들이 재판부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출석을 거부하는 등 재판진행이 교착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후 위 결정에 대한 중간상소에 따른 상소심에서 제1심의 변호인 선임결정은 타당하지만 피고인의 주도적 재판진행권을 제한한 것은 지나치다는 이유로 피고인을 도로 ‘운전석’에 앉혀 주어 재판이 다시 진행되게 되었으나, 결국 피고인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망하여 절차가 종료하고 만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2. 세셸

세르비아의 급진당의 당수인 세셸(Seselj)도 변호인 없이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준비절차 중에는 이른바 ‘대기 변호인(stand-by counsel)’을 선임하여 향후 필요시 절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재판진행을 지켜보도록 한 적이 있고 재판이 시작된 후에는 피고인의 방해로 재판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번에 걸쳐 재판부 직권으로 변호인을 강제로 선임하여 재판을 진행하게 한 적이 있는데(세셸은 이에 항의하여 약 4주에 이르는 기간 단식을 한 바 있다), 결국은 상소심에서 사전 경고가 부족하였다든가 또는 제1심 재판부가 재량권을 남용하였다는 이유로 위 결정들이 모두 파기되었다.

그 후 세셸은 다시 변호인 없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 최근에는 그의 증인보호와 관련된 정보유출 등의 혐의로 법원모욕죄로 기소되었고 이를 이유로 검찰측이 제기한 변호인 강제선임신청이 다시 계류 중이다.

3. 카라지치

그밖에도 2~3명의 피고인이 변호인 없이 재판을 받고 있거나 받겠다고 하고 있고 그 중에는 특히 최근에 구속된 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카라지치(Karadzic)도 변호인 없이 재판을 받겠다고 하고 있다. 최근 ICTY에서는 지금까지의 판례를 참조하여 ‘정의관념에 합당한 경우(in the interest of justice)’에는 재판부가 직권으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는 일반 규정을 신설한 바 있는데, 카라지치 사건은 그 사건 자체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자기변호권의 의의 및 그 한계를 둘러싼 위 규정의 해석, 적용에 관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한편 이러한 피고인들이 변호인 없이 재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법정에서의 재판에 한한 것으로 이들은 법정 밖에서는 ‘legal associates’이라고 불리는 각자의 법률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고 있고, 밀로셰비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Ⅳ. 맺으면서

피고인이 변호인의 도움을 거부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근저에는 역설적으로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무기대등의 이념이 녹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형사소송법의 해석상 ‘필요적 변호사건’에 있어서는 자기변호권이 인정될 수 없다고 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비준한 ICCPR은 우리나라에서 국내법적 효력이 있으므로(국내법보다 우선하는 헌법적 효력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앞으로 ICCPR 제14조에 근거하여 자기변호를 주장하는 피고인이 생기는 경우에 우리 법원이 이를 어떻게 해석할는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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