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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수터대법관의 퇴임사)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매일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결혼도 마다한 연방대법원의 유일한 독신, 20년 동안 워싱턴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지만 고향인 뉴햄프셔의 소박한 농가에서 지붕을 고치고 독서하는 평범한 전원생활이 그리워 속으론 늘 향수병을 앓아온 사람, 손수 운전을 고집하며 항상 낮은 자세로 임했던 대법관 데이빗 수터가 올해 여름을 마지막으로 대법원을 떠나겠다고 발표하였다. 데이빗 수터 대법관은 현재 69세로 9명의 연방대법관 중 네 번째로 젊다. 88세인 스티븐스 대법관과 76세로 최근 췌장암 수술까지 받은 긴스버그 대법관도 아직 은퇴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고 있는 가운데 수터 대법관의 은퇴선언은 이례적으로 보이지만 늘 귀거래사를 읊어온 그이기에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수터 대법관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 햄프셔 주 검찰총장과 주 대법관, 연방 제1구역 항소법원 판사를 거쳐 1990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공화당 정권에 의해 임명되었음에도 수터 대법관은 낙태권을 인정한 Roe v. Wade 판결을 지지하고, Bush v. Gore 판결에서 소수의견에 가담하는 등 진보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따라서 그가 지금 사임하더라도 오바마 대통령이 그 후임으로 진보적 대법관을 임명할 것이 분명한 이상 현재 연방대법원의 세력 균형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수터 대법관이 사퇴를 발표하자 그 시각부터 모든 미국 언론은 긴급 뉴스로 그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날 백악관 브리핑 시간에 예고 없이 나타나 “수터 대법관은 공정하고 중립적인 판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고, 어떠한 신조도 절대적이라고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 하나하나에서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훌륭한 판사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는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그의 헌신적 봉사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라고 헌사를 보냈다. 아울러 그는 후임자 선정기준에 대하여 “추상적인 법이론이나 판례집의 각주까지 잘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이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고, 국민들의 희망과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곧바로 백악관 안에 소수정예의 자문단이 구성되어 인선작업에 착수한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은 여야 상원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광범위한 의견수렴 작업을 별도로 진행 중이다. 오바마 대통령을 잘 알고 있는 인사들과 그를 만난 의회 지도자들은 그가 ‘실용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인사를 지명할 것이라는 데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현재 히스패닉계 여성인 소냐 소토마이어 연방 제2구역 항소법원 판사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는 가운데, 하버드 법대 학장 출신인 엘레나 케이건 법무부 송무차관과 오바마 대통령과 시카고 로스쿨에서 함께 강의했던 다이안 우드 연방 제7구역 항소법원 판사도 유력 후보군에 포함되어 있다. 다이안 우드 판사는 지난해 우리 사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한한 바 있다. 이 밖에 한국계인 고홍주 예일대 법대 학장도 워싱턴 포스트가 뽑은 대법관 후보군에 포함되어 있다.

한편, 수터 대법관은 퇴임 발표 이후인 지난 5월5일 자신이 ‘Circuit Justice’로 있는 연방 제3항소구 법관회의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퇴임의 소회를 밝혔다. 미국은 각 항소구(Circuit)마다 한 명의 대법관을 Circuit Justice로 지정하여, 그 항소구에서 제기된 긴급한 신청사건을 전담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해마다 그 항소구 법관회의에 참석하여 소속 법관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하는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수터 대법관은 펜실베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지역을 관장하는 제3항소구의 Circuit Justice로서 지난 20년 동안 이 법관회의에 참석해서 강연을 해 왔다.

수터 대법관은 300여명의 이 지역 판사와 변호사들 앞에 서서 “당초 이 자리에서 고별사를 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사퇴 의사가 언론에 공개된 이상 이제 자신도 판사로서의 삶에 대한 결산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매우 감정에 휩싸여 연설 도중 때때로 목이 메기도 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민감한 사건이나 법률적 쟁점에 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판사로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던 일부 대법관들과 달리 평생을 낮은 목소리로 살아온 그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대표적으로 내세울 유명한 판례도 많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에서 그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판사로서 그는 각 사건의 기록을 꼼꼼하게 읽고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으로 동료들에게 유명했다. 그는 대원칙을 중시하기보다는 개별 사건에서 합당한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판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판결을 내리는 화려한 순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 모인 판사들에게 과연 50년 혹은 40년이 지난 판결을 인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물었다. 그는 대부분의 판사가 하는 일이란 흐르는 물줄기 속으로 아주 빨리 가라앉고 마는 것이며, 판사는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그 거대한 물줄기의 일부가 되는 것에서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추구하듯이 흠잡을 데 없는 재판진행이나, 다음해 판례집에 실릴만한 완벽한 판결문을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운이 좋아 판사 시절 그런 판결을 몇 개 남긴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그 의미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판사들은 법률을 다루는 장인(craftsman)이며, 일을 하려고 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장인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울러 장인들처럼 일 자체를 통하여 인생의 만족감을 얻고 그것을 보상으로 여기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20년 전 뇌졸중을 겪고 사임한 브레넌 대법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직후, 이 법관회의에 처음 참석하기 전에 브레넌 대법관을 찾아가 혹시 판사들에게 전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그들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오”라고 말했던 일화를 회고하면서,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저도 여러분께 할 말은 오직 그것뿐입니다”라는 말로 20년간 계속되어 온 강연을 마쳤다.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10월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개정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상원 인준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조만간 후보자를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벌써부터 각 정파간의 기싸움과 각종 보수 및 진보단체들의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이념 검증 전쟁이 시작된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대법관 임명절차는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터 대법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후임자가 전임자 못지않은 장인정신을 갖고 있는지 만큼은 철저히 검증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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