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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판사례

[미국 오판사례] 인종적 편견

조원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1980년 8월23일 아침 9시 무렵에 텍사스 주 휴스턴 부근에 위치한 콘로고등학교에 벨빌고등학교 여자배구팀이 도착하였다. 그 일행 중에는 매니저를 맡고 있는 Cheryl D. Fergeson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경기가 열리기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시합이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결국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샅샅이 수색을 펼치게 되었다. 2시간쯤 지나 학교의 관리인 2명이 강당 무대 위의 다락에서 합판에 덮인 Fergeson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옷은 벗겨진 채 교살된 듯 목에는 벨트자국이 나 있었다. 경찰은 처음 시신을 발견한 Henry I. Peace와 Clarence Brandley에게 혐의를 두고 지문, 모발 및 혈액을 채취하는 한편,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하였지만 거짓 반응이 나오지 않자 이들을 석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지역 주민들이 크게 동요하였고, 특히 딸을 둔 부모들은 범인이 잡힐 때까지 새 학기가 시작되어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주민들의 공포와 분노 속에서 학교나 경찰당국으로서는 무언가 신속히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흑인인 Brandley를 1급살인 혐의로 체포하였다. Brandley는 학교 내 모든 출입문의 열쇠꾸러미를 가진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체에서 3개의 체모가 발견되었는데, 육안상 Brandley의 것으로 보였다. 동료 관리인들인 Acreman, Sessum, Martinez의 진술에 의하면 피해자가 강당 옆의 화장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Brandley가 화장지를 들고 나타났기에, 화장실 안에 여학생이 있다는 말을 하자, 그는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후 Brandley는 그들 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건물로 가 잡일을 하도록 지시하였고, 자신은 계속 그곳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Brandley와 함께 처음 사체를 발견한 Peace는 당시 Brandley가 다락을 가리키며 두 번이나 그곳을 살펴보고 오도록 시켰고, 나중에는 Brandley가 함께 올라가 합판을 들춰보라고 하여 그 밑에서 사체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Peace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Brandley는 냉정하게 피해자의 맥박을 재보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배심원 선정절차에서 검사는 무이유부기피(peremptory challenge)를 통하여 흑인들을 모두 배제하였다. 처음 사건을 진행한 판사는 변호인들로부터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자 스스로 회피하였다. 재판에서 피고인은 스스로 증인으로 증언하였으나, 대부분이 백인인 동료 관리인들의 증언과 배치되었다. 1980년 12월 평의에서 배심원 중 William Srack이 끝까지 유죄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평결불성립(hung jury)이 선언되었는데, 당시 다른 배심원들이 그를 ‘검둥이 옹호자’라고 비난하였다고 한다. 평결불능에 이른 사정이 알려지자, 그는 수없이 협박전화를 받았다.

1981년 2월에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서 동료 관리인들은 피고인만이 사체가 발견된 강당의 출입문 열쇠를 갖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의학전문가들은 1.25인치 넓이의 피고인의 벨트가 피해자의 목을 조르는 데 사용된 것과 일치한다고 증언하였다. 1981년 2월13일 Brandley는 유죄평결을 받았고, 다음날 판사는 배심원단의 권고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로부터 약 11개월이 지나 변호인들은 항소를 준비하면서 상당수의 증거들이 재판 중 사라졌음을 확인하였다. 예를 들면, 변호인들은 Brandley가 사건 당일 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날 Brandley를 찍은 사진이 없어졌다. 검사는 Brandley의 벨트가 살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경찰이 피해자의 질과 양말에서 발견하였다는 체모가 사라졌고, 심지어 시신에서 채취된 정자 샘플이 1심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폐기되었다. 하지만 1985년 5월에 주 항소법원은 변호인들이 제기한 수많은 의문점들에도 불구하고 항소를 기각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6년이 지났을 때 Brenda Medina라는 여성이 새로운 제보를 하였다. 전 남편인 James D. Robinson이 살인범죄를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남편이 허풍을 떠는 것으로 보고 이를 무시하였고, 그동안 한 번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접한 적이 없어 1986년 초에 한 이웃으로부터 우연히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범행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녀는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검사에게 이를 알렸지만, 검사는 Medina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소식이 Brandley의 변호인 귀에 들어갔고, 변호인은 Medina로부터 선서진술서를 받아내었다. Medina는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통과하였다.

1986년 콘로에서 열린 인신보호청문회(habeas hearing)에서 Brenda Medina가 증언을 하였는데, 전 남편인 Robinson은 백인으로 사건이 있기 약 한 달 전에 학교에서 해고되었고, 자신이 아기를 임신 중이던 1980년 8월 어느 날인가 밤늦게 귀가하여 소녀를 살해하였다고 하면서 당분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가 있겠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다음날 아침에 그는 피 묻은 운동화 한 켤레를 남겨둔 채 떠난 후 소식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Robinson도 청문회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였는데Medina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그녀에게 겁을 주어 헤어지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증거들이 나타났음에도 항소법원에서 재심신청은 기각되었다. 다행히 그 무렵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많은 인권운동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87년 2월 하순경 사형집행일이 정해지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콘로 시내를 행진하면서 항의시위를 하였다.

3월20일에 대법관 Coker는 사형집행의 보류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시간을 벌게 된 변호인은 증거심리를 위한 예비청문회(evidentiary hearing)를 열 것을 신청하였다. 변호인은 강당 출입문 잠금장치에 문제가 있어 누구라도 열쇠 없이 들어갈 수 있고, 더구나 Brandley가 열쇠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님을 추가로 밝혀내었다. 1987년 6월30일에 항소법원은 청문회의 개최를 결정하였다. 청문회에서 동료 관리인들인 Gary Acreman과 Icky Peace가 증언을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경찰로부터 진술서와 다른 내용으로 증언을 하면 위증죄로 기소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는 두려운 나머지 먼저 재판에서 위증을 하였다는 것이다. 10월에 청문회는 Brandley의 극적인 승리로 끝났다. 청문절차를 주재한 판사는 수사과정에 인종적인 편견이 개입되어 위법하게 위증이 유도되었고, 그 결과 적법절차의 원칙이 부정될 정도로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졌다고 보아 항소법원에 새로운 재판이 열려야 한다는 권고의견을 제시하였다. 1989년 12월13일에 항소법원에서는 1심법원에 새로 심리를 열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검사가 불복하였으나 주 대법원은 항소법원의 결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주 대법원의 결정이 있은 후 검사는 증거가 소멸하였음을 이유로 Brandley에 대한 기소를 철회하였다.

<출처 : Michael L. Radelet, Hugo Adam Bedau, Constance E. Putnam, “In Spite of Innocence”(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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