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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오바마 대통령의 첫번째 판사 임명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지난 3월16일 저녁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에서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11년간 이 지역의 연방검사로, 또 30여년간 이 법원의 판사로서 봉직하다가 2007년 세상을 떠난 토마스 플래너리(Thomas Flannery) 판사를 기리는 연례 강좌가 열렸다. 필자도 평소 친분이 있는 램버트(Royce Lamberth) 법원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날의 강연이 열린 대법정은 매우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유족들과 후배 검사들, 플래너리 판사를 모셨던 로클럭들을 비롯한 워싱턴의 저명한 법조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아직도 이곳 법조계에는 선배에 대한 따뜻한 존경심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특히 이날의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워싱턴 DC 연방검사 출신인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법무부장관 에릭 홀더가 참석하여 그를 직접 만나보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다.

법무부장관의 소개를 받으며 등장한 램버트 법원장은 그가 끝까지 남아 지켜보는 가운데, 현재 DC 연방법원이 겪고 있는 사건처리 지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법관의 상원인준절차를 둘러싼 지나친 정쟁을 중단해 줄 것을 강한 어조로 호소하였다. 램버트 법원장은 비록 자신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공화당원이지만, 최근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이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법무부 부장관과 고위간부의 인준을 그들이 변호사 시절 맡았던 사건의 내용을 이유로 반대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나아가 “후보자 흠집 내기와 앙갚음에 관한한 여야가 따로 없다”며 “여야 할 것 없이 당신(정치권)들이 우리 사법부를 망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1987년 당시 자신의 상원 인준절차도 정쟁으로 말미암아 6개월이나 걸렸으나, 요즘에는 인준절차가 2~3년씩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면서, 어느 법관이 대통령에게 두 번 다시 자신을 지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을 정도로 인준절차가 우수한 인재들로 하여금 법관직을 기피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DC 연방지방법원이 계류 중인 220여건의 관타나모기지 수용자들의 인신보호 사건을 우선 처리하느라 다른 민사사건은 올 여름까지 기일을 잡기 어렵고, 형사사건은 간신히 법에 정해진 기일을 맞추고 있는 형편인데도 3명의 공석이 채워지지 않고 있어 법원장으로서 어려움이 있음을 호소하면서, 오바마 대통령도 자신이 후보 시절에 내세웠던 법관 임명 기준을 고집하지 말아야 하고, 여야 모두 판사 인준에 관하여 ‘정쟁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판사들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개인적 시각과는 과감하게 ‘이혼’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다음날인 3월17일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연방항소법원 판사 지명을 단행하였다. 876명의 연방법관 중 56석이 공석으로 남겨져 있는 상태에서 오마바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 시절 보수화된 법원을 변화시킬 진보적 색채가 강한 후보들의 지명을 강행할 것인가는 향후 오바마 대통령의 대의회 정책을 예견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인사로 법원을 채울 것이라는 보수파들의 우려와 달리 오바마 대통령은 비교적 중도적으로 평가되어 보수파도 반대할 명분이 약한 51세의 인디아나 연방지방법원 판사 해밀턴을 제7구역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한다고 발표하여, 향후 판사 인준과정에서의 정쟁을 중단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백악관은 이번 인선이 오바마 행정부가 향후 임명할 법관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가 다양한 경력을 갖춘 중도적인 인물로서 그는 판결에서 훌륭한 판단력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심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인준절차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인디아나 주의 공화당 소속 루거 상원의원은 해밀턴 판사의 인준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공언했고, 백악관은 이번 지명이 상원의 초당파적인 협력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념전쟁이 쉽게 가라앉을 리는 없다. 정치공방은 의회보다 장외에서 격화되고 있다. 보수단체들은 해밀턴이 ‘위장된 중도파’일 뿐 실상은 “매우 진보적’이라고 비난하였다. 나아가 오바마 대통령이 진정으로 정쟁 중단을 원한다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지명을 받았으나 민주당의 반대로 인준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법관 후보 중 일부를 다시 지명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촉구하였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클린턴으로부터 지명을 받고 공화당의 반대로 인준을 통과하지 못한 후보 중 2명을 법관에 다시 임명하는 초당파적 제스처를 보여준 사례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남아있는 공석을 조만간 임명할 예정이라고 하나, 앞으로 가야할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주 워싱턴DC에서 열리고 있는 연방법관회의에 참석한 각급 법원장과 판사 대표들은 1990년 이후 항소심 사건이 42%, 1심 사건이 34% 증가하였다며 51석의 지방법원 판사직과 12석의 항소법원 판사직을 증원해달라는 결의를 채택하여 의회에 전달하였다. 재판할 사건은 폭증하고 있는데 판사직 증원은 고사하고 자신들만의 정략적 이유로 공석조차 몇 년째 채워주지 않고 있는 의회를 바라보면서 미국의 판사들이 느껴야 했을 허탈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나라든 판사의 관심과 정치인의 관심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법부를 정쟁의 장으로 끌고 간 것은 과거의 이념과 쉽게 ‘이혼’하지 못한 판사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