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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헌법판례열람

[미국헌법판례열람] 최고법원은 왜 인권보장의 최후보루인가

임지봉 교수(서강대 법대)

미국 헌법상의 적법절차조항에서 낙태권이라는 권리를 처음으로 도출해낸 연방대법원 판결로 1973년의 Roe v. Wade(410 US 113) 판결이 유명하다. 이 사건에서 위헌여부가 문제된 텍사스주 낙태법은 당시 대부분의 미국 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전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임신상태의 계속이 산모의 생명에 치명적일 때를 제외하고는 낙태를 전면적으로 금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판결문에 곧잘 등장하는 Roe나 Doe는 본명이 아니고 우리말의 ‘모모’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송당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사용하는 익명의 성인 것이다. Roe는 보통 여성에게, Doe는 보통 남성에게 사용된다. 본 사건에서 Roe라는 익명을 사용한 원고는 텍사스주 구석구석을 떠도는 순회서커스단의 매표원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불량배들에게 납치되어 윤간을 당하였고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이 여성은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낙태를 금하고 있던 텍사스주 낙태법 때문에 의사는 낙태수술을 거부했고, 이 주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하라며 이 젊은 여성에게 수술 대신에 변호사를 소개시켜준다. 이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는 단계에서 Roe는 출산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비록 Roe의 임신상태는 종료되었으나, 임신이 다시 반복될 수 있어 다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구체적 사건성이 인정되어 이 사건 소송이 계속 진행되었다.

Blackmun 대법관에 의해 집필된 유명한 다수의견은, 헌법상의 기본권인 프라이버시권은 임신 여성이 임신상태를 중단할 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고 판시하면서 Roe의 손을 들어주었다. 낙태를 전면적으로 금하는 텍사스주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린 것이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연방헌법이 프라이버시권에 관해 명시적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프라이버시권은 과거로부터 인정되어왔다.

이 프라이버시권은 본 법원이 생각하듯 수정헌법 제14조의 인간의 ‘자유’에 근거하고 있건, 수정헌법 제9조의 열거되지 않은 국민의 권리에 근거하고 있건, 아주 넓은 포괄적 권리여서 여성의 임신 중단 여부를 결정할 권리도 포함한다. 프라이버시권과 같은 근본적 권리를 제한하는 주법조항은 긴절한 주의 이익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이때에도 그 주법은 좁게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이 사건에서 텍사스주는 태아가 수정헌법 제14조에 의해 생명권이 보장되는 ‘인간’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 연방대법원은 그런 취지의 판결을 내린 적이 없다. 대체로 태아는 아직까지 법에 의해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텍사스주가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생명에 대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궁지에 처한 임신 여성의 권리를 억누를 수는 없다. 그러나 임신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주는 임신 여성의 건강을 보호할 정당한 이익을 가지며 잠재적 생명을 보호할 정당한 이익도 가진다.

이 두 이익들은 임신기간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커지며, 어느 시점에서는 각각의 이익들이 모두 긴절한(compelling) 것이 된다. 임신 ‘첫 3개월(first trimester)’ 동안은 낙태로 인한 사망자수가 출산으로 인한 사망자수보다 더 적다. 임신 4개월째부터 주는 임신 여성의 건강 보호라는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의사에게 면허를 준다든지 일정한 시설을 갖추게 한다는 등 임산부의 건강에 관련된 방법으로 낙태절차를 규제할 수 있다. 임신 4개월부터 6개월까지의 세 달 동안 의사는 임신 여성과 상의하여 낙태할 것인가의 여부를 주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임신 마지막 석달인 7개월부터 9개월까지는 태아가 모체 밖으로 나와도 일반적으로 사실상의 생존능력을 가질 수 있는 시기로서 주는 잠재적 생명의 보호라는 주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의미에서 임신여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낙태를 제외한 모든 유형의 낙태를 규제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 텍사스 주법은 임신 초기단계에서의 낙태와 그 후 단계에서의 낙태를 구분하지 않고 너무 광범위하게 낙태를 규제하고 있어서 위헌무효이다.

이 판결이 임신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인 낙태권을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시켜 낙태를 전반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이 판결은 낙태문제와 관련하여 임신기간을 3개월씩 3부분으로 나누어 첫 석달은 자유로운 낙태가 가능하고 마지막 석달은 오히려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켜 주가 임산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낙태를 제외한 모든 유형의 낙태를 금지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즉, 낙태규제와 관련하여 ‘3분기 이론틀’이라는 절충적 방안을 제시하여 임산부의 프라이버시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충돌을 규범조화적 해석을 통해 절충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의 Blackmun 대법관이 다수의견에서 밝혔듯이 미국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 적법절차조항의 ‘자유’ 속에서 프라이버시권을 도출하고 있다. 그 전인 1965년 Griswold v. Connecti-cut 판결에서 다수의견을 집필한 Douglas 대법관은 몇몇 권리장전조항들이 모여 형성한 권리의 ‘주연부(penumbra)’로부터 프라이버시권이 도출된다고 보기도 했었다. 이 모든 노력들이 다 미국헌법에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명문규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라이버시권에 속하는 권리들은 모두 결혼, 출산, 자녀 양육에 관련된 것들이다. 피임약이나 피임기구를 사용할 권리, 가족과 함께 살 권리, 자녀 양육과 교육을 감독할 권리, 결혼의 자유 등이 프라이버시권에 포함된다.

낙태권을 이 프라이버시권의 하나로 선언한 것이 바로 이 Roe v. Wade 판결이다. 그러나 물론 낙태권에 대한 제한도 존재한다. 주정부는 다른 유형의 수술에 공적 자금을 지원할 수 있지만 낙태에 관해서는 의료보험 등의 공적 자금 지원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가족계획 관련 병원들에 공적 지원을 하는 대가로 주는 그 병원들의 의사가 낙태를 권하지 않고 다른 낙태시술자에게 환자를 소개시켜 주지 않을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주정부는 낙태를 허용할 경우에도 그 시술되는 낙태의 유형에 관해 규제권한을 가진다. 예를 들어 2번째 분기인 임신 4개월에서 6개월 사이의 낙태에 대해 반드시 병원에서 이를 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국민과의 관계에서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와 같은 최고법원의 존재 이유는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이 선거로 구성되는 기관을 통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소수자 인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보호하는 데 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입법부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대통령은 선거에서 재선되기 위해 항상 다수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신경을 쓴다.

반면에 최고법원의 재판관은 선거를 통해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기 때문에 다수 국민의 의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수국민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 및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이들의 인권 신장을 판결을 통해 획기적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소수자 및 약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전향적이고 선도적인 판결을 내려가는 것이 최고법원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사법적극주의의 모습인 것이다.

미국에서 여성 임산부들에게 임신상태를 중단하는 낙태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도 입법부의 법률이나 행정부의 정책 집행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미국의 최고법원인 연방대법원이 약자인 임산부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용기에 찬 전향적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러한 어마어마한 변화가 가능했다. 이런 최고법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보장의 최후보루’라 불리워질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