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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18) 도쿄 전범 재판과 잊혀진 피고인들

권오곤 UN ICTY 재판관

1. 글머리에

작년 11월11일은 도쿄 전범 재판의 판결이 선고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뤄진 뉘른베르크 재판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고 이에 관한 문헌도 많으나, 도쿄 재판은 그 그림자에 묻혀 국제 사회에서나 학문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도쿄 재판을 담당한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뉘른베르크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① 평화에 반하는 죄(침략전쟁) ② 전쟁 범죄(전쟁법 및 전쟁관습법 위반죄) ③ 반인도적 범죄 등 세 가지 범죄를 관할하였는데 이들은 재판소 헌장의 규정에 따라 각각 A급, B급, C급 범죄로 불리기도 한다. A급 범죄로 기소된 도조 히데키 전 수상 등 28명의 피고인들에 대한 도쿄 재판은 1946년 5월3일에 시작되어 1948년 11월11일에 판결이 선고되었는데, 그 중 7인에 대하여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2. 도쿄 전범재판의 문제점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범 재판이라는 의의를 가지지만, ‘승자의 정의’를 실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승전 4개국 출신의 재판관만으로 구성되었던 뉘른베르크 재판소에 비하여, 도쿄 재판소의 경우에는 항복 문서에 서명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캐나다,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이외에 인도와 필리핀까지도 재판관(도합 11명)을 파견하여, 보다 더 ‘국제’ 재판소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의 침략을 당하여 많은 피해를 입은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와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이 그 재판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일본 천황을 기소하지 않은 것은 도쿄 재판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자탄을 사용한 미국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으면서 일본의 전후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미국의 정치적 고려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밖에도 도쿄 재판에 대하여는 소급입법에 의한 처벌, 재판절차의 적법성, 재판소 인력의 적절성, 통역의 적절성 여부 등 여러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제국주의 일본과 그 관련자들이 범한 범죄를 무효화할 정도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고, 여기에 피고인 전원에 대하여 무죄 의견을 낸 Pal 재판관의 반대의견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소이가 있다.

3. 한국의 입장에서 본 도쿄 재판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피폐되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국으로 취급되지 않은 채, 도쿄 재판과 관련된 소추 범위의 결정, 피의자의 선정 및 재판소의 구성 등에 있어서 그 입장이 전혀 반영되지 못하였다. 물론, 식민 지배가 그 자체로써 개인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된 무효의 조약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합법을 가장하여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노동자, 군인 내지 종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것은 그것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4. 잊혀진 피고인들: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의 경우

B, C급 전범은 종전 후 아시아지역 7개국 49개소에 설치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중국 등 5개국의 군사재판소에서 총 5,700여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 중 148명이 한국인이었고 그들 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으로, 그 중 1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그들 일부에 대한 재판 기록을 호주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 읽었는데 그 자세한 소개는 지면 관계상 다른 기회로 미루지만 그 소회는 한마디로 가슴을 저미는 안타까움이었다. 이들 한국인들은 자원하여 포로감시원이 된 것이기는 하나, 일제의 강제징용이나 식민 수탈을 피하기 위하여 지원하게 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의 피해자로 볼 여지가 있는데, 이러한 점이 연합국 군사재판소의 재판관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한국인 포로감시원에 대하여 일본군 장교 등과의 공범으로 당시 포로수용소의 일반적인 열악한 상황에 대한 책임까지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이 개인적으로 범하였다고 하는 개개의 가혹행위에 대하여 형사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연합국의 국민에 대하여는 군사 법정이 아니라 자국의 일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한 관례를 한국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반대신문이 보장되지 않은 서면 재판의 문제점과 통역의 적정성 등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모든 사정을 감안할 때 적어도 극형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그 양형의 적정성에 관하여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5. 맺으면서

일본은 종전 후 일본인 전범에 대하여 보상을 행하였으나 한국인 전범들에 대하여는 그 국적을 이유로 보상을 거부하였고, 한국 정부도 이들에 대한 보상을 외면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정부는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을 제정하여 그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2007년 초 그 위원회에서 86명의 한국인 포로감시원 내지 그 유족들이 제기한 신청 사건에 관하여 이들이 일제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자임을 인정하는 결정을 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절차와 문서의 비공개 원칙으로 인하여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 접근할 수 없었으나 법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단순한 강제동원 피해사실의 확인에 그치는 것일 뿐 연합국 군사재판소에 의한 전범 재판 결과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전범 재판기록을 분석하여 적절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결국 우리들 법조인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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