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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오바마와 멀리건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지난 1월20일,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 200만의 미국인들은 건국 이래 첫번째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워싱턴으로 모여들었다. 필자처럼 TV를 통해 취임식을 지켜본 사람도 무려 세계 각국에서 약 10억명에 달한다고 한다. 예정시각이 다가오자 TV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레드카펫 행사처럼 취임식에 초청받은 인사들의 입장 장면부터 중계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대법관들이 나란히 입장하였다.

취임선서를 주관하는 대법원장뿐만 아니라 대법관 전원이 법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이 특이했다. 아울러 샌드라 오코너 전 대법관과 제프리 미니어 대법원장 수석보좌역, 윌리암 서터 재판사무국장, 대법관들의 경호와 법정 질서유지를 책임지는 대법원 마샬(Marshal) 파멜라 탈킨 등 필자와 안면 있는 분들의 반가운 모습도 눈에 띄었다.

오바마 당선자가 마지막으로 입장하면서 취임식의 역사적 막이 올랐고, 먼저 조 바이든 부통령의 취임선서가 이어졌다. 1972년부터 상원의원을 지낸 관록의 조 바이든은 최선임 대법관인 존 폴 스티븐스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였다. 1975년 대법관에 임명된 88세의 노 대법관은 대통령 선서보다 훨씬 긴 부통령 선서를 정확하게 암기하였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대통령의 취임선서였다. 취임식에 쏠린 온 세계의 시선이 너무 버거웠던지,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는 수재형 판사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예기치 않은 실수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별 대단치 않은 실수담은 이미 많은 언론에 소개되어 자세히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요지는 로버츠 대법원장이 미국 연방헌법 제2조 제1항에 명시된 선서문을 선창하면서 ‘faithfully’란 단어의 어순을 바꾸는 바람에 오바마 대통령과 호흡이 맞지 않아 몇 차례 말이 엉키는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놀라운 것은 가십거리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이 일을 가지고 일부에서 대통령 취임선서가 헌법규정을 위반했다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백악관은 논란의 조기 진화를 위해 취임식 다음날 아침 로버츠 대법원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취임선서를 다시 실시했다는 것이다. 법복을 다 입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준비 되셨습니까?”라고 묻자 오바마 대통령은 “네. 오늘은 아주 천천히 합시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선서는 25초만에 완벽하게 끝났다. 두 번째 선서는 성경을 든 가족들도 수백만 청중도 없이 약식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분위기는 처음보다 훨씬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다소 지나친 결벽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이들의 끔찍한 헌법준수 의지에 약간의 시기심마저 생겼다. 워싱턴포스트지는 “골프로 치면 이런 것을 바로 멀리건(Mulligan)이라고 부른다”는 말로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날의 주인공이 오바마와 로버츠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언론의 호들갑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많은 언론들이 오바마 대통령이 상원의원 당시 인준에 반대했던 로버츠 대법원장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두고 여러 말들을 만들어 내던 차에 적시안타가 터져 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러니는 역사적으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취임식 전 이미 뉴욕타임즈는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노예제 지지판결을 내렸던 로저 태니 대법원장 앞에서 취임선서를 한 링컨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폴라 존스 사건의 구술변론을 마친 바로 1주일 후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 취임선서를 주관한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당시 대법원장이 선서를 마친 대통령에게 ‘Good Luck’이라고 속삭인 것이 논란이 되었다), Bush vs. Gore 판결로 대선의 승자를 결정짓고 얼마 후 부시 대통령의 취임선서도 주관한 렌퀴스트 대법원장을 언급하면서,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슈퍼스타가 선서대에 마주서는 순간 전기가 통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것은 단지 상원의 인준과정을 둘러싼 식상한 스토리 때문만이 아니다. 전쟁 후인 1955년과 1961년에 각각 태어나 하버드 법대에 진학하고,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을 거쳐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두 사람은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 최고의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처음부터 법조계의 전통적인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프렌들리 연방항소법원 판사와 렌퀴스트 대법관의 로 클럭으로 시작하여, 법무부와 백악관의 법률담당과 대형 로펌의 파트너, DC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모두 거쳤다. 대법원에서 39차례나 변론을 하면서 대법관들로부터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였다. 이와 반대로 오바마가 선택한 길은 전통적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액의 연봉을 마다하고 시카고로 돌아가 어려운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젊음을 바쳤다. 변호사란 직업도 법대 강사도 이런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봉사와 희생이란 자양분으로 성장한 그는 더 큰 봉사를 위해 선거로서 공직에 진출하는 길을 택했고, 미국은 그를 선택했다.

이런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지난 해 12월 오바마와 바이든 당선자에게 서한을 보내 취임식 전에 대법원을 방문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 바 있다. 그는 과거에도 가끔씩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 전에 대법원을 방문하여 대법관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으며, 이러한 관행이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오바마와 바이든 당선자는 초청에 화답하여 취임식 일주일 전 연방대법원을 전격 방문하였고, 기자들을 내보낸 채 대법원장 및 7명의 대법관들과 함께 45분간 환담을 나누었다. 한편 오바마가 인준에 반대했던 얼리토 대법관은 이날 오전 구술변론에 참석했음에도 당선자와의 상견례에는 불참하였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오바마 당선자에게 외부에는 절대 공개되지 않는 대법관 합의실 내부를 비롯하여 대법원 내부를 친절히 안내해 주는 예우를 다하였다.

미국은 철저한 삼권분립의 국가이지만, 그 견제와 균형의 이면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깔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오바마 행정부가 쏟아낼 새로운 정책들은 멀지 않아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새로운 대법관을 지명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진심으로 ‘Good Luck’이라고 속삭였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