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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판사례

[미국 오판사례] 증언대의 보안관

조원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조원철 판사의 미국 오판사례는 EDWIN M.BORCHARD 예일대 교수가 1932년 미국의 오판사례들을 묶어 펴낸 'CONVICTING THE INNOCENT'를 서울중앙지법 조원철 부장판사의 번역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1921년 7월23일 아침 미네소타 주 엘머런드의 파머스 스테이트 은행에 무장강도가 침입하였다. 5명이 차를 타고 와 그 중 4명이 은행 안으로 들어가 수분 만에 현금과 유가증권을 강탈하여 달아났다. 범인들은 경찰 수색망을 뚫고 달아났고, 현상금이 걸렸다.

그 해 10월에 세인트폴에서 조지 휴이즈라는 사람이 도난차량을 타고 다니다가 체포되었다. 경찰 당국은 엘머런드 은행강도범의 인상착의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가, 체포된 휴이즈를 주목하게 되었다. 은행 현금출납원인 린퀴스트와 고객으로 범행을 목격한 증인들이 세인트폴로 소환되었다. 그들은 휴이즈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같은 달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자신의 전과기록 때문에 증인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는 유죄평결에 따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 5월에 부(副)보안관 M. L. 해머스트롬이 대배심에 나와 세인트폴의 루이스 쏠빅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엘머런드 은행강도에 가담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쏠빅은 노르웨이로부터 이민을 온 벽돌공 조수였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은행 현금출납원 린퀴스트와 고객 블룸퀴스트가 쏠빅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다만, 다른 은행 고객인 칼 위버그는 쏠빅이 범인인지 여부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원래 일용노무자였다가 엘머런드 은행강도가 있은지 얼마 안 된 1921년 9월부터 보안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해머스트롬의 증언에 의하면 휴이즈가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이송될 때 그로부터 쏠빅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휴이즈의 말을 듣고 세인트폴로 가 쏠빅이 가끔 들르던 식당과 술집에 자주 찾아가 그곳에서 쏠빅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러다가 쏠빅이 은행강도에 가담한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헤머스트롬의 증언에 의하면 쏠빅은 볼드이글에 있는 철도회사 물탱크 부근에 훔친 금품을 숨겨놓았다는 것이나, 수색 결과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쏠빅은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세인트폴에 오기까지의 그의 전 인생에 대하여 증언을 하였다. 그는 군 복무를 하였고, 제대한 후에는 벽돌공 조수로 일하였다. 그는 범행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부보안관 해머스트롬은 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 엘머런드에는 간 적도 없다고 부인하였다. 그는 사건이 있던 날 세인트폴 렌돌프 가(街)에 위치한 스트레인지 씨의 주택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고, 그의 고용주와 동료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다. 쏠빅은 특별히 그 날을 기억하는 이유에 대하여도 증언하였는데, 마침 그날이 집주인 마르타 존슨의 생일이었고, 오후에 생일파티에 참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검사는 스트레인지를 증인으로 소환하였는데, 그는 수첩을 보면서 사건 당일에는 작업이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나아가 검사는 쏠빅이 해머스트롬에게 자백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인으로 앤더슨이라는 사람을 세웠다. 배심원들은 유죄평결을 내렸고, 쏠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쏠빅은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하였지만, 자력이나 도와줄 친지가 없어 항소를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25년 제임스 E. 라플린이라는 남자가 엘머런드 은행강도사건으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노스다코다 주의 교도소에서 미네소타 주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증인들은 그가 범행 당시 차량을 운전한 사람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1급 강도죄의 유죄를 인정하는 쪽으로 플리바게닝을 하려고 하였으나, 검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한 채 정식기소를 하였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라플린은 종신형을 선고받던 날 밤 당국에 휴이즈와 쏠빅이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검사와 미네소타 은행가 보호협의회장인 찰스 브라운 앞에서 진술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범행의 모든 상세한 내용 및 다른 4명의 공범자가 샤인 앨런, J. B. 화이트, 컬리 휠러 및 빌 베일리라고 진술하였다. 나아가 그는 범행 후의 행적에 대하여도 진술하였다.

1926년 초에 쏠빅은 나중에 검사가 된 M. F. 킨케이드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킨케이드는 5년간 라플린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찾아내었다. 라플린이 공범으로 지목한 화이트와 앨런은 위스콘신 주의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화이트는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다. 휠러는 1922년에 살해되었는데, 그의 부인은 휴이즈가 휠러로 오인되었으리라는 추리에 도움을 주었다. 베일리만이 추적이 되지 않았는데, 이들이 범행 후 들른 호텔, 도주경로, 돈을 분배한 장소, 엘머런드에 오고 가는 사이에 범한 다른 강도사건 등에 대하여 일단의 증인들이 증언을 하였다. 증인들은 휴이즈와 쏠빅이 자신들이 목격하였던 범인들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쏠빅의 무고함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알리바이 증거도 발견되었다. 그는 사건 당일 실제로는 렌돌프 가에 위치한 스트레인지의 주택이 아니라 더글러스 가에 위치한 다른 주택 공사장에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쏠빅이 은행 문을 지키던 범인일 것이라고 추측한 증인은 그 범인이 키가 크고 머리칼이 검정색이라고 증언하였으나, 쏠빅은 누가 보더라도 평균 정도의 키에 머리칼도 붉은색이었다. 사건 당일 휴이즈가 엘머런드에서 약 600마일 떨어진 아이오와 주 디모인의 로저스 호텔에 숙박을 하였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은 주 사면위원회에 제출되었고, 1931년 7월에 휴이즈와 쏠빅 두 사람은 무고하다는 이유로 사면이 승인되었다. 그때까지 휴이즈는 10년간, 쏠빅은 9년간 복역을 하였다. 부보안관 해머스트롬과 증인 앤더슨이 쏠빅의 자백을 들었다는 증언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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