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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미국 사법부의 자세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미국 대법원장은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지난 한 해 동안 사법부의 성과를 돌이켜보며 다가오는 새해의 사법부 운영 방향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연차보고서를 발표하는 관행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행은 1970년 워렌 버거 대법원장 시절 처음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지난 해 연차보고서를 통해 입법부와 행정부와의 협력 강화, 고도화된 법관 윤리기준의 준수, 연방판사들의 보수 현실화를 구체적 목표로 제시했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올해 연차보고서의 대부분을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사법부의 긴축경영 노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연방판사들에 대한 보수 현실화는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지난 2008년 회계 연도에 미국 사법부가 배정받은 예산은 62억불로 총 3조불에 달하는 미국 전체 예산의 0.2%에 불과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삼권분립을 이루는 한 축에 해당하는 사법부 예산이 국가 전체 예산의 0.2%에 불과한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비록 미미한 예산이지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예산 절감을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소개하였다. 그는 사법부가 렌퀴스트 대법원장시절부터 “법원의 효율적 운영”을 강조하여 왔고, 경제위기가 오기 훨씬 전인 2004년 9월 이미 연방법관회의에서 50여개의 사업에 대한 실사 요구를 포함하는 예산절감 방안을 채택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 결과 임차료와 인건비 지출, 정보화사업 등 세 영역에서 상당한 비용절감이 가능했다고 한다.

우선 당시 사법부 예산의 19%를 차지했던 임차료 지출을 줄이기 위하여 임차료 현황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통해 부당하게 부풀려진 임차료를 삭감하였고, 비용증가 상한제를 도입하여 신규 건물 도입을 유예시킴으로써 판사와 직원들의 1인당 공간은 줄어들었지만 종전 임차료의 17%를 감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법부 예산의 57%를 인건비가 차지하는데, 그 90%에 해당하는 재판보조 및 행정 인력에 대한 보수가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의 경중, 숙련도, 업무 실적을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보수산정 방법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또한 종전에는 판사 한명이 2명 이상의 로클럭을 고용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경력직 로클럭 한명만을 고용하도록 하고 그 대신 필요에 따라 단기 계약직 로클럭의 활용을 권장한다고 한다. 이 밖에 법원행정처와 연방사법센터의 인력을 현수준에서 동결하기로 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약 3억불의 비용절감이 예상된다고 한다.

또한 정보화 예산을 통하여 법원마다 업무 전산화를 통한 효율성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각 법원별로 분산된 각종 서버 및 배심원 관리, 보호관찰 프로그램 등 각종 시스템 통합을 통해 상당한 비용절감을 이루어냈다고 한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렇게 절감된 비용이 행정부나 의회가 보기에는 미미한 수치에 불과할지 모르나 국가전체 예산 중 0.2%만을 쓰는 사법부로서는 대단한 성과였음을 잊지 말아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러한 ‘저지방(non fat) 식단’만으로는 사법부의 활기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최고 중 최고(the best of the best)’인 판사들이 계속 법원에 매력을 느끼고 남아있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요즘과 같이 국가가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여 사업 실패와 주택 압류, 파산이 속출하고, 의회가 위기 극복을 위해 새로운 종류의 법률들을 제정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이런 시기일수록 법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럴 때일수록 법원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대우받고,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분쟁이 해결되는 재판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화된 기술주도형 경제가 지배하는 오늘날 갈수록 복잡해지는 법률분쟁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판사들은 보다 많은 연구와 사색, 경험을 통해 풍부한 지식과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최고 수준의 사법부를 유지하길 원한다면 “여기저기서 오라는 곳이 많은” 이미 성공한 법률가들이 판사직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사들이 이미 적은 보수를 감수하고 명예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지적을 염두에 둔 듯 “물론 판사들이 처음 판사직을 제의받고 수락했을 때 그 보수가 어느 정도인지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의회가 물가상승분에 따른 보수인상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감소되리라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공직 진출의 순수한 동기를 변호하였다.

스미소니언 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해 11월 재개관한 미국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한 성조기에 관한 이야기로 보고서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1814년 독립전쟁의 포화 속에서 밤새 나부끼며 미국의 승전 소식을 전했고, 그 장면을 바라본 한 시민으로 하여금 지금의 미국 국가(國歌)를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던 소중한 깃발이 한동안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손상된 채 방치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회고하였다. 그는 마찬가지로 이 깃발이 상징하는 가치를 지키려면 국민들은 방관이 아니라 선거, 배심원, 병역, 납세와 같은 헌법상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공직 진출을 통해 국가의 통치기능에 적극 참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위대한 정부가 되려면 모든 국민들이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들의 재능과 이상을 아낌없이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법부 연차보고서가 발표되자 워싱턴포스트는 신년 사설을 통해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곤궁에 빠져있는 현 상황에서 매년 약 17만불에 가까운 보수를 종신으로 보장받는 안정적 일자리를 과소평가할 것은 결코 아니지만, 실제 유능한 판사들이 경제적 이유로 법원을 떠나는 사례가 생기는 현실에서 판사들의 보수가 인상되어야 함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특히 의회가 물가상승에 따른 실질임금 보전마저 배제한 조치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지지하였다.

판사들의 보수 보전법안은 지난 해 상원과 하원의 법사위를 각각 통과하였으나 본회의를 앞두고 예기치 않은 경제위기에 직면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올해도 경제상황이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으나 의회가 대법원장의 간절한 호소를 물리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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