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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가장 작지만 큰 법원, DC Circuit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존 로버츠 대법원장, 긴스버그, 스칼리아, 토마스 대법관 4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단 대법관들의 이념적 성향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는 미국의 전통에 따른다면 진보파를 대표하는 긴스버그와 보수 성향의 나머지 대법관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정답은 이들 모두가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직전에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의 판사로 재직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5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13개의 연방항소법원이 있는 넓은 땅인 미국에서 9명의 현직 연방대법관 중 4명이 같은 법원 판사 출신이라는 점은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사법시스템은 크게 주 법원(State Courts)과 연방 법원(Federal Courts)으로 나누어진다. 각 주마다 별개의 주 대법원을 정점으로 한 사법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주 법원 판사의 임명은 각 주법에 따라 이루어지고, 주 판사들은 미국 연방헌법 제3조가 신분을 보장하는 이른바 ‘article III Judges’에 해당하지 않는다. 보통 주 대법관을 지낸 후에 연방법원의 판사로 임명되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주 법원 판사로서 연방대법관에 바로 임명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경우로는 2006년 현역에서 물러난 오코너 전 대법관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원래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 출신인 그녀는 애리조나 주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1981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하여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명 당시 최초의 여성이며, 연방 항소법원 판사는 물론 주 대법관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인 인사로 평가되었다.

한편 미국의 연방 법원은 94개의 연방지방법원과 13개의 연방항소법원, 1개의 연방대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3개의 연방항소법원은 미국 전역을 12개의 구역(Regional Circuit)으로 나누어 지리적으로 각 구역을 관할하는 12개의 연방항소법원과 지역에 상관없이 국제무역, 특허 등에 관하여 전국적 관할권(Federal Circuit)을 갖는 연방항소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12개의 지역은 넓이가 균등하지 아니하여 미국 서부의 알래스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하와이, 아이다호, 몬태나, 네바다, 워싱턴, 오리건 주를 모두 관할하는 최대 규모의 제9구역 연방항소법원이 있는 한편 인구 60만에 불과한 워싱턴 DC만을 관할하는 최소 규모의 DC 연방항소법원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러나 DC 연방항소법원이 미국 연방항소법원 중 지리적으로 가장 좁은 지역을 관할하는 판사 정원 11명의 작은 법원이라고 하여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DC 연방항소법원은 미국의 수도를 관할하는 지리적 특성상, 워싱턴 DC에 위치한 행정 각부와 주요 연방기관들의 정책결정 과정 및 내용의 적법성에 대한 법률 판단을 내리는 매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DC 연방항소법원의 판단이 곧 미국의 주요한 국가정책 방향 결정에 있어 1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DC연방항소법원의 판사직은 연방대법관으로 가는 중간 과정으로 여겨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스칼리아, 토마스, 긴스버그 대법관이 모두 이 법원 판사로 재직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고, 레이건 대통령이 연방대법관 후보로 지명하였으나 인준에 실패한 보크 판사와 도날드 긴스버그 판사도 모두 DC 연방항소법원 판사였다. 뿐만 아니라 빈슨 대법원장과 워렌 버거 대법원장, 러틀리지 대법관도 모두 이 법원을 거쳐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 상원은 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연방판사 후보자가 지명되면 인준절차에 앞서 먼저 해당 지역구 상원의원에게 찬반의견을 조회하고 상원 법사위는 그 의견회신을 인준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료로 고려해 주는 관례를 가지고 있다. 즉 지역구 상원의원이 반대할 경우 연방판사의 인준이 사실상 어려워지므로 인선 과정에서부터 그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주가 아닌 수도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는 워싱턴 DC의 경우 지역구 상원의원이 존재하지 아니하므로 대통령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사람을 지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중에서 많은 대법관이 배출된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최근에는 이 자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인지 인준절차가 과거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스칼리아 대법관을 비롯한 워싱턴 법조계의 보수파 판사 및 변호사들 몇 명과 함께 주기적으로 서로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모여 포커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베팅액은 아주 미미하지만 그저 마음에 맞는 법조인 친구들끼리 포커 테이블에서 마음껏 떠들고 여기서 나눈 대화는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고 한다. 이 모임의 멤버는 DC 연방항소법원장 센틸리, DC 연방지방법원장 램버트, 전직 DC 연방지방법원장 호건, 빌 클린턴의 변호사였던 밥 베넷 등이다. 이 모임의 면면을 보면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DC 연방법원 출신 판사들과 매우 막역한 사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임에 최근 ‘제2의 존 로버츠’라고 불리는 42세의 젊은 DC 연방항소법원 판사 브렛 캐버너(Brett Kavanaugh)가 추가로 초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젊은 나이지만 뛰어난 학문적 성과와 다양한 경력, 준수한 외모를 지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뒤를 이을 것으로 평가되는 캐버너 판사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민주당의 존 로버츠’라고 불릴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진보계열의 메릭 갤런드(Merrick Garland) DC 연방항소법원 판사가 연방대법원에 가장 먼저 입성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래저래 DC Circuit에 있는 판사들과 그들의 판결, 법원 운영 등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미국 사법부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호사가들이 넘쳐나는 워싱턴이지만, DC Circuit 출신 법조계 주요 인사들과 변호사들이 모여 포커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두고 특별히 색안경을 끼고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워싱턴 법조계에는 어느 정도의 낭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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