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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대법원에 간 대통령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내년 1월20일로 예정된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열기가 벌써부터 워싱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미국 역사상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의 취임식을 보기 위해서 400여만명이 워싱턴 시내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만7,000개에 달하는 워싱턴의 호텔 방은 이미 예약이 끝났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될 24만장의 티켓을 구하기 위한 경쟁도 뜨겁다. 위 티켓은 상하원 의원들에게 할당되어 배포될 예정인데, 아직 배포되지도 않은 취임식 티켓이 경매시장에서 이미 2만불을 호가한다는 풍문이 도는 가운데, 미국 최대 인터넷 경매업체인 이베이(eBay)는 오바마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사 온라인시스템을 통한 취임식 티켓의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흥미로운 것은 취임식 준비를 위하여 상하원 합동 특별위원회가 결성되어 컨셉과 주요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링컨 대통령 탄생 200주년 기념일을 불과 며칠 앞둔 날 취임하는 첫 흑인 대통령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상하원 합동위원회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나오는 ‘자유의 새로운 탄생(A New Birth Of Freedom)’이란 말을 취임식의 주제로 정하였다.

대통령 취임의 순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대통령의 취임선서 장면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링컨 기념관이 마주보이는 의사당 서쪽 광장에서 역사적인 취임 선서를 하게 될 예정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왼손을 성경에 얹고 오른손을 든 채 존 로버츠 대법원장 앞에서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국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준수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하고, 조지 워싱턴 대통령 이후의 관례에 따라 “하나님, 부디 저를 도와주소서(So help me God)”라는 기도도 덧붙인다고 한다.

이처럼 대통령이 대법원장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는 것은 미국의 오랜 전통이다.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장에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양 소매에 황금색 사선이 달린 법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단상에 오른 윌리암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존재는 단연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80세의 대법원장은 갑상선암으로 진단받아 힘든 항암치료를 받아가며 두달 넘게 대법원의 구술변론에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취임선서를 주관해 달라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의 서한을 받고 어렵게 참석을 결정하였다. 1월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투병 중인 대법원장은 법복 안에 목도리를 겹겹이 겹쳐 두른 채 단상에 꼿꼿이 서서 1989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이래 계속되어 온 대통령 취임선서를 주관하였다.

1793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윌리엄 쿠싱 대법관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1797년 제2대 존 아담스 대통령이 올리버 엘스워스 대법원장 앞에서 취임선서를 한 이래 자리 잡은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굳건히 이어져 미국 역사상 현직 대법원장이 대통령 취임선서를 받지 않은 사례는 8번에 불과하다고 하니,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아홉번째 사례로 기록되길 원치 않았던 마음을 짐작할 듯하다. 그러나 나머지 8번의 사례도 취임선서의 주재자들이 연방항소법원장, 뉴욕주 대법원장 등 대부분 판사들이었던 것을 보면 미국인들이 판사에 대해 갖는 존경심과 판사의 권위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편, 그렇다면 대법원장의 취임선서는 누가 주재하는지도 궁금해진다. 지난 2005년 9월29일 상원에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인준동의안이 통과되고 난 뒤 바로 4시간 후, 백악관에서는 조지 부시 대통령 내외와 존 로버츠 대법원장 내외, 두 자녀, 써굿 마샬 전 대법관의 미망인, 7명의 현직 대법관, 상원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부시대통령이 증인의 하나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부인이 들고 있는 성경에 손을 얹고 최선임 대법관인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였다.

대법원장의 취임식은 백악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법원장은 가을 개정기가 시작하는 10월3일 아침 연방대법원에서 법원조직법에 따른 두 번째의 선서의식을 가졌다. 백악관에서는 일반 정장 차림이었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날은 법복을 입었다. 다만 그는 전직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입었던 황금색 사선이 달린 대법원장용 법복을 사양하고 다른 대법관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검은색 법복을 입었다. 그는 대법정 법대 아래에 서서 스티븐스 대법관 앞에서 종전과 같은 내용으로 두 번째의 취임선서를 했다. 취임선서를 마치고 가족 및 동료 대법관들과 기념촬영을 한 후 평소보다 30분 늦은 10시 30분에 역사적인 첫 번째 구술변론을 진행하였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역사적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첫 재판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날 직접 대법원을 방문하여 선서식을 참관하고 법복을 입은 대법원장을 법대 위의 자리로 직접 모시는 등 정중히 예우를 다하였다.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법정 앞쪽 좌우측으로 귀빈 및 대법관의 초청 손님들을 위한 좌석과 기자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귀빈용 방청석에는 미국 대통령과 외국의 국가원수, 전직 대법관, 법원도서관장 등 고위직 공무원들이 앉을 수 있는 7개의 가죽 의자가 놓여 있다. 부시 대통령이 재판을 방청한 자리도 바로 이 귀빈석의 첫 번째 좌석이다. 오코너 대법관 등 전직 대법관들도 관심있는 구술변론이 열리는 날이면 이 자리에 앉아 재판을 방청한다고 한다.

그 뒤에는 대법관의 초청 손님들을 위한 의자가 놓여있는데, 대법관별로 자신의 이름이새겨진 3개의 고정석이 주어지고, 그 좌석들은 대법관 서열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자리에 앉는 분들은 대법관들이 그야말로 개인적으로 초청한 손님들로 신분이 다양하다고 하나, 대법관들의 배우자가 와서 재판을 방청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하니 우리 시각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이 밖에 미국의 어느 연방법원 대법정에서 새로 변론할 자격을 부여받은 변호사들이 판사 앞에서 엄숙한 선서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본 일이 떠오른다. 미국의 법정에는 이처럼 국민들이 법관직을 성직에 버금가게 느끼도록 하는 여러 장치와 의식들이 숨어 있다. 우리에게는 언제부턴가 재판이 갖는 이러한 의미가 너무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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