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경제 위기와 사법의 역할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미국은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금융위기에 직면해 있다. 미국 의회가 7,000억불의 구제금융 지원법안 처리를 두고 마지막 격론을 벌이고 있던 날, 바로 의사당 인근에 있는 조지타운 로스쿨 강당에서는 전직 연방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 현직 연방대법관인 스티븐 브라이어, 19년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던 ‘경제 대통령’ 앨런 그린스펀 등 사법부와 경제계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업과 법원의 관계’를 논하고 있었다. 필자도 운 좋게 그 자리에 초청받아 오코너 대법관과 인사를 나누고 대가들의 강연을 직접 들으며 미국 사법부가 국가 경제와 기업에 대하여 갖고 있는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코너 대법관은 퇴임 후 조지타운 로스쿨과 손잡고 미국 사법부의 현실을 진단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녀가 현 시점에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법원과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컨퍼런스를 연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왜 기업과 법원인가? 기업은 생산을 담당하는 주요한 경제주체인 동시에 법원의 입장에서는 법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 미국 대기업 법무실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 중 33%는 현재 25건 이상의 소송을 진행 중이며, 18%는 무려 100건이 넘는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또한 그 중 40%가 지난 한해 동안 소가 2,000만불이 넘는 소송을 한건 이상 제기당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미국의 사법부가 기업 관련 소송을 처리하는 방식은 미국 경제의 생산성에 어떤 방향으로든 영향을 주게 된다. 한편 기업들은 사법서비스의 수준을 경제적 관점에서 냉정히 평가하고, 보다 효율적인 대안적 분쟁해결 절차(ADR)를 찾아 법원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참석자들은 먼저 기업들을 다시 법원의 주요 고객으로 되돌릴 방안은 있는지, 그리고 과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대기업의 법무담당자들은 기업이 법원을 떠나는 이유로 소송절차의 지연과 배심재판의 예측불가능성, 과도한 손해배상액 산정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대하여 델라웨어주 대법원의 랜디 홀랜드 대법관이 소개한 사법시스템은 그 대안으로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델라웨어는 미국에서 면적이 두 번째로 작은 주이지만,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상장기업 50% 이상의 본점소재지로서 ‘세계 기업의 수도’라고 불린다. 델라웨어주는 그 곳에 주소를 둔 기업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많은 혜택을 주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사법부도 그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홀랜드 대법관은 델라웨어주 사법시스템의 특징으로서 형평법 문제를 다루는 Court of Chancery를 기업전문법원으로 특화하여 기업관련 분쟁은 기업법에 전문적 식견을 가진 판사가 배심원 없이 신속한 판결을 하도록 한 점, 중간단계의 항소심 법원이 없는 2심제를 도입한 점, 새로운 기업관련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그에 적합한 절차를 연구하여 즉시 적용하는 이른바 ‘맞춤형 재판절차’를 도입한 점, 일찍이 경영판단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의 판례를 확립한 것을 비롯하여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장려하는 판례법을 축적해 온 점, 대법원 평균 심리기간이 37.8일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복잡한 기업사건도 60일 이내에 종결될 정도로 매우 신속한 재판을 실시하고 있는 점 등을 들면서, 그 결과 기업들이 스스로 법원을 찾게 되었다며 법원이 최종적 분쟁해결기관의 역할을 마다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주제는 ‘판사의 보수’에 관한 것이었다. 판사의 낮은 보수 수준으로 인해 더 이상 우수한 인재들을 법원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판사직이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한 디딤돌로 전락하면 사법서비스의 질은 저하되고 국가경제의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기업의 판사 선거자금 지원 문제’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판사 선거가 과도한 상호비방과 자금동원 경쟁으로 혼탁해지고 있고, 기업들은 이 기회에 판사들에게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함으로써 향후 유리한 판결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일부 판사들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한 기업 관련 재판을 회피하지 아니하고 기업에 유리한 판결을 한 사례가 대법원에 상고되면서 이러한 의혹이 실제 상황으로 드러나고 있다. 발표자들은 정의를 돈으로 산다는 인식의 확산은 시장의 불신으로 이어져 그 피해가 결국 기업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지적하며, 책임 있는 경제주체로서 기업의 올바른 처신과 판사선거제도의 개혁을 당부하였다.

한편 앨런 그린스펀 전 FRB의장은 “요즘과 같은 시기에 위대한 조정자였던 오코너 대법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고 하면서 “지금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유일한 국가기관은 사법부 뿐”이라고 말문을 연 뒤 “헌법 원칙을 준수하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면 경제는 다시 살아날 것”임을 주장하였고, 스티븐 브라이어 연방대법관은 “경제 위기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지금 사법부와 기업이란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좌중의 웃음을 이끌어 낸 뒤, 곧바로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현재의 미국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근본적 이유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며 경제 위기의 원인이 법원칙의 경시와 무뎌진 법집행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컨퍼런스를 마친 다음날 의회는 7,000억불의 구제금융법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은 그 즉시 법안을 공포하였다. 그럼에도 세계 경제는 여전히 요동치고 있다. 문제는 시장의 신뢰이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와 법원칙을 세우는 것은 사법부의 몫이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