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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판사례

[미국 오판사례] 사형집행장의 잘못된 이름

조원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조원철 판사의 미국 오판사례는 EDWIN M.BORCHARD 예일대 교수가 1932년 미국의 오판사례들을 묶어 펴낸 'CONVICTING THE INNOCENT'를 서울중앙지법 조원철 부장판사의 번역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1901년 10월17일 새벽 5시 동트기 전 플로리다주 팰라카의 남부철도회사 조차장에서 시신 1구가 발견되었다. 사망자는 화물열차 기관사인 해리 웨슨이었다. 웨슨은 머리 뒤쪽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호주머니는 밖으로 뒤집어져 있었는데, 이는 살해의 동기가 강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작업바지 안쪽에 130불짜리 지폐뭉치가 남아 있었다.

웨슨은 그날 새벽 4시경에 조차장에 도착하여 열차를 측선에 넣은 후 사무실로 가 체크를 하였는데, 그때가 4시19분이었다. 웨슨은 바로 사무실에서 나와 도시락통을 들고 집으로 향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블록 가량 떨어진 곳에서 권총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중에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는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안관은 즉시 용의자 몇 명을 감옥에 구금하였는데, 그 중에는 조차장의 야간경비원인 루치오 크로포드, 전철수인 해리 랜든 등이 있었다. 오후 5시에 간수 헤이건이 감옥 입구에 서 있다가 흑인 한 명이 담장 갈라진 틈에 다가와 감옥 마당에 나와 있던 크로포드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헤이건은 그 흑인이 전직 보조차장이었던 J. B. 브라운이었고, 그가 크로포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보고하였다. 브라운은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브라운과 피살된 기관사 사이에 안 좋은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차장인 르배런은 지난 8월에 브라운이 해이한 자세로 열차를 연결하는 것을 보고 나무라면서 열차 사이에서 브라운을 끌어내 뺨을 때렸다. 그러자 브라운이 쇠막대로 르배런의 등을 때렸고, 르배런이 웨슨에게 소리쳐 구원을 청하자, 그가 기관차에서 달려와 르배런에게 권총을 건넸다. 그러자 브라운은 달아났다. 하역인부 폰더는 9월 어느 날 브라운이 자기에게 그 소동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권총으로 웨슨을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브라운이 신문을 받으면서 10월16일 저녁부터 다음날인 17일 아침까지의 행적에 대하여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16일 초저녁에 글로버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는 뉘른베르그의 집에 가서 글로버, 뉘른베르그 및 샌더스와 소소한 게임을 즐겼고, 밤 11시 반경에 게임이 끝나자 글로버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잤으며, 일어나서는 열차 끝의 승무원 칸으로 가 윌슨, 비크, 데이비스 및 J. J. 존슨 등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보안관 사무실의 직원들은 웨슨과의 갈등을 살해의 동기로 보고 브라운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를 하였다. 해리 랜든은 16일 브라운이 자신에게 25센트를 빌려달라고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상관없어, 나는 오늘밤 209호 열차를 타고 가는데 그 열차는 남쪽으로 가 208호 열차를 만날 거야”라고 말했다고 진술하였다. 208호 열차는 웨슨이 운전하는 열차였다.

17일 아침 카드게임을 할 때 브라운은 돈을 한웅큼 갖고 있었다. 그때 카드게임을 하였던 사람들 중 일부는 브라운이 흥분하여 있었고, 존슨을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 서로 귓속말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와 같이 브라운에게 불리한 정황증거들이 소소한 것이라도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어느날 브라운과 한 방을 쓰는 미첼이 보안관을 불러 브라운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브라운이 존슨과 공모하여 웨슨이 지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존슨의 권총으로 브라운을 쏘아 살해한 후 브라운은 돈 4불 75센트를 가져갔고, 존슨은 시계를 차지하였다”고 알려왔다.” 또 다른 수감자인 데이비스도 브라운이 범행을 시인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검사는 사건을 대배심으로 가져갔고, 대배심에서는 브라운과 존슨을 1급살인죄로 기소하기로 결정하였다. 브라운은 1901년 11월19일 법정에 세워졌다. 죄수 미첼과 데이비스는 브라운이 자백했음을 법정에서 증언하였다. 브라운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 글로버도 10월16일 밤부터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자기 집에서 잤다고 증언하였다. 이에 대하여 보안관과 부보안관은 그들이 브라운을 체포하였을 때 글로버와 대화를 나눴는데, 당시 그는 브라운이 자기가 깨기 전에 가버렸기 때문에 언제 집을 나갔는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브라운은 웨슨과는 말다툼조차 한 적이 없었고, 자신은 권총을 소지한 바도 없다고 범행을 부인하였다. 돈에 대하여 브라운은 글로버가 그에게 1불을 주었고, 그 돈으로 저녁에 카드게임을 하여 돈을 땄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여러 증인들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브라운은 10월17일 감옥 담장으로 간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간수 헤이건이 증인으로 나와 목소리와 뒷모습으로 브라운임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감옥에서의 자백에 대하여 브라운은 자신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감옥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도 미첼이 때때로 관헌들과 뭔가를 상의하였고, 브라운으로 하여금 자백을 하도록 애를 썼지만 브라운은 항상 자신은 무고하다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재판은 이틀째 계속되었고, 11월20일 유죄평결이 내려졌다. 다음날 판사는 브라운에게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피고인이 항소를 제기하였지만 1심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브라운에 대한 교수형의 집행을 위하여 사형집행장이 낭독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집행장에는 사형수가 브라운에 대하여 유죄평결을 내린 배심장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사형집행장에 의해서는 아무도 집행되지 않았다. 브라운의 변호인은 주지사에게 종신형으로의 감형을 청원하였고,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다. 1902년 봄에 검사는 존슨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였다. 1913년 초에 존슨은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가 단독으로 웨슨을 총으로 쏘았고, 브라운은 그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류의 자백이 신빙성이 없는 경우도 많으므로 당국에서는 모든 관련 자료들을 주의 깊게 검토하였고, 결국 존슨이 진범이고 브라운은 무고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13년 10월1일에 주지사가 판사와 검사의 권고에 따라서 브라운을 사면하였는데, 그때 이미 브라운은 12년을 복역하여 육체적으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불구에 가까운 상태였다.

브라운은 위증과 정황증거의 희생자였다. 증인들은 브라운을 피살자와 연관시키는 정황들에 암시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사형집행장에 사형수의 이름이 잘못 기재된 것은 천우신조였다. 하지만 브라운은 결딴난 인생의 나머지를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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