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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판사례

[미국 오판사례] '시신(屍身)'을 찾는 광고

조원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조원철 판사의 미국 오판사례는 EDWIN M.BORCHARD 예일대 교수가 1932년 미국의 오판사례들을 묶어 펴낸 'CONVICTING THE INNOCENT'를 서울중앙지법 조원철 부장판사의 번역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셀리 보른은 러셀 콜빈과 결혼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콜빈을 괴짜로 여겼다. 가끔 한 번에 8·9개월씩 갑자기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812년 5월에 콜빈이 사라졌을 때에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콜빈이 사라지기 직전에 집안에 심각한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토머스 존슨은 콜빈이 사라진 날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셀리의 오빠인 제시와 스티븐이 콜빈과 서로 격앙되어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 싸움이 있기 전부터 보른 형제들과 콜빈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주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콜빈이 사라진 초기에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러 주가 지나자 사람들은 보른 집안에 관하여 그들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해내기 시작하였고, 때로는 사라진 콜빈과 연관을 짓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보른 형제들 중 하나가 콜빈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다.

시간이 흘러 콜빈이 사라진 지 거의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819년 봄에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아모스 보른이라는 보른 집안의 노인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콜빈은 아모스의 침대 곁에 나타나 자신이 살해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를 따라오면 묻힌 곳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묻힌 곳은 대략 4평방피트 크기의 오래된 지하 공간이었고, 그 위로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 꿈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 꿈에 사로잡힌 아모스는 콜빈이 살해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살인이 있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교외에 있는 보른 집안의 낡은 헛간이 화재로 불타버렸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가, 어느 사이엔가 콜빈의 살해 증거를 감추기 위하여 화재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제시와 스티븐을 점점 더 옭아매는 제3, 제4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한 청년이 개와 함께 보른 집안의 교외 집 근처를 걷고 있는데, 개가 오래 된 그루터기 아래에서 발길을 멈춘 채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이 발견되었다. 그 지역사회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고 뭔가 조치가 취해질 것이 요구되었다. 콜빈이 사라진지 거의 7년이 다 돼가는 1819년 4월 27일 제시 보른이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신문은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동안 증거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졌다. 보른 일가의 집 아래 오래된 지하 공간에서 큰 칼, 주머니칼, 단추가 발견되었는데, 단추와 주머니칼은 콜빈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그루터기 밑에서 발견된 뼈들은 사람의 뼈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토요일에 제시는 스티븐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스티븐이 살인을 했다고 진술하였다. 스티븐과 콜빈이 함께 일하다가 싸우게 되었는데, 스티븐이 몽둥이로 콜빈의 머리를 때려 두개골이 골절되었다는 것이었다. 제시는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하면서도 시체가 발견될 만한 장소 몇 군데를 언급하였다.
다음날 일요일에 사람들은 흥분한 가운데 콜빈의 유골을 찾기 위하여 몇 마일이나 들쑤시고 다녔다. 지하 공간이 열렸고, 나무 그루터기는 뒤집혔으며, 언덕들이 샅샅이 탐색되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월요일에 뉴욕에 가 있던 스티븐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대배심원인 힐은 스티븐을 체포하여 오면서 증거가 충분하니 자백을 하라고 다그쳤다. 스티븐과 제시에 대하여 대질신문이 행해졌지만, 스티븐은 혐의를 부인하였다.

감옥에서 사일러스 메릴이라는 위조범이 보른 형제들과 함께 있었는데, 9월에 대배심이 열렸을 때 메릴은 증인으로 세워졌다. 메릴은 감옥에서 제시로부터 듣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스티븐과 콜빈이 싸움을 하였는데, 스티븐이 콜빈을 강타하여 실신시켰고, 콜빈이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제시와 스티븐이 부친 바니 보른의 도움을 받아 콜빈을 지하 공간으로 옮겨 그곳에서 바니가 콜빈의 목을 부러뜨린 후 땅에 묻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에 제시와 스티븐이 유골을 파내어 화재로 불탄 헛간으로 옮겼고, 헛간이 불탄 후에 일부 뼈들을 수습하여 가루를 낸 다음 강에 버렸다. 나머지는 바니가 수습하여 속이 빈 그루터기에 감추었다.”

피고인 측에서 메릴이 법정에서 증언을 하면 감형을 약속받았다고 주장하며 그 신빙성을 탄핵하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위와 같은 증언을 한 후에 자유를 얻어 시내를 활보하였다.

피고인 측에서는 제시가 메릴에게 하였다는 자백이라는 것이 제시가 체포된 후에 한 자백을 보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 또 하나의 자백이 있었다. 11월에 공판이 시작되기 전에 스티븐이 유죄를 인정하고 콜빈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다고 진술하였다. 스티븐은 부친과 제시를 관련시키지 않았다. 그는 시체를 울타리 구석진 덤불 아래 숨겼다가 어두워진 후에 돌아와서 근처에 묻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나중에 어떻게 유골들을 낡은 헛간으로 옮겼는지, 헛간이 화재로 타버린 후 그 중 일부를 강에 버리고 나머지를 오래된 그루터기에 숨겼는지를 말하였다.

법정에서는 앞서 있었던 대부분의 진술이 반복되었고, 스티븐의 자백이 메릴의 증언을 탄핵하기 위하여 제시되었다. 변호인인 전직 판사 리처드 스키너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유죄평결을 내렸고, 1820년 1월 28일 보른 형제들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사면에 대한 청원서가 주 의회에 제출된 후 제시의 형이 종신형으로 감경되었지만 스티븐의 청원은 기각되었다. 스티븐은 최후의 수단으로 신문에 콜빈을 찾는 광고를 내기로 하였다. 콜빈을 자세히 묘사한 기사가 러틀랜드 해럴드지에 실렸다. 그 기사에는 콜빈의 소재를 안다면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기사는 뉴욕 이브닝 포스트지에 다시 실렸다.

뉴저지 슈루즈버리에 거주하는 타보르 채드윅은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이브닝 포스트지에 실린 기사를 읽고 콜빈의 묘사에 일치하는 한 남자가 그의 처남 윌리엄 폴헤무스와 함께 뉴저지 도우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채드윅은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고, 마침 전에 맨체스터에 살면서 콜빈을 알고 있었던 뉴욕시민 제임스 웰프리는 그 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채드윅의 편지를 보고 폴헤무스의 집을 찾아갔다. 일터에서 돌아온 콜빈을 보자 웰프리는 그가 보른 형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바로 그 콜빈임을 알아차렸다. 웰프리는 집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콜빈을 수차례 설득한 끝에 결국 그를 데리고 맨체스터로 갔다. 웰프리와 콜빈이 맨체스터에 도착하였을 때 축제 분위기와 같았다. 콜빈은 그의 옛 친구들 및 이웃들과 인사를 나눈 후 스티븐을 면회하러 갔다. 처남에게 채워진 족쇄를 보고서 콜빈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내가 당신을 살해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야”라고 스티븐이 대답하였다. “너는 나를 해치지 않았잖아”라고 콜빈이 말하였다. “제시가 쇠톱으로 나를 한 번 때렸지만, 많이 다치진 않았어.”

법적 절차에 따라 보른 형제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심리가 재개되었고, 검사는 기소를 취하하였다. 1820년에 그들은 주 의회에 보상을 청원했으나 거절되었다.

콜빈이 오랜 기간 사라진 점, 보른 형제들과의 싸움과 관련하여 콜빈과 보른 형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 등이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쉽게 보른 형제가 콜빈을 살해했다고 믿도록 하였다. 콜빈의 방랑벽이 이러한 믿음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모스 보른의 꿈은 그루터기 밑에서 발견된 뼈에 과도한 의미와 비중을 부여하였다. 그것이 사람의 뼈가 아님이 입증된 후에는 사람들의 의심이 사라질 것처럼 보였지만, 그때 제시의 자백이 의심을 부활시켰다. 의심할 여지없이 보른 형제들은 교수형을 면해 보려는 희망에서 허위자백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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