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워싱턴 법조계

[워싱턴 법조계] 법관의 아름다운 은퇴

강한승 판사(주미대사관 사법협력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1981년 미국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연방대법관에 임명됐다. 그녀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연방대법원에서 주요한 사건마다 합리적인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던 그녀는 지난 2006년 홀연히 대법관직을 떠났는데, 그 이유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요양 중인 남편을 돌보기 위하였음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법관을 사임한 이후에도 계속되는 ‘판사 오코너’로서의 열정적 삶이다.

그녀의 공식 직함은 ‘retired Justice’이지만 여전히 판사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연방대법원 청사에 로클럭과 비서가 있는 집무실을 두고 현직 대법관들과 동일한 보수를 받는다. 물론 현직에 있을 때의 집무실은 다른 대법관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대법관을 위한 좀 더 아담한 집무실로 옮겼다고 한다. 그녀는 가끔씩 다른 지역에 있는 연방항소법원을 찾아 3인 합의부의 일원으로 재판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고, 관심 있는 사건의 연방대법원 구술변론이 열리는 날이면 대법정의 귀빈용 방청석에 앉아서 재판을 방청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법권 독립과 법치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는 명예대사로서 정부, 의회, 학교는 물론 외국 사법부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미국의 ‘senior judge’ 제도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 헌법 제3조에 의해 연방대법관 및 연방판사는 한번 임명되면 평생 동안 판사직을 유지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판사가 연로해서 통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음에도 그 자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법원이나 본인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된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와 헌법 정신을 조화롭게 해결하면서 판사들에게 명예로운 은퇴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senior judge 제도이다.

미국도 최초에는 판사로 한번 임명되면 계속 판사로 지내거나, 판사를 완전히 사임(resign)하고 사임 당시의 보수와 같은 연금을 받는 것만이 허용되었으나, 의회는 1919년에 이르러 senior judge 제도를 새로 만들어 또 하나의 선택권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판사가 현역 은퇴와 동시에 senior judge 지위를 선택하면 계속 현직과 동일한 보수를 받고 보좌직원과 집무실을 유지하며 본인이 원하는 바에 따라 최소한의 재판을 담당할 수 있지만, 그 판사직은 법률상 공석이 돼 대통령이 후임 판사를 추가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37년부터는 연방대법관까지 이 제도의 적용이 확대돼 워렌 버거 대법원장은 퇴임 후 senior judge 신분으로 헌법제정 2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수행했고, 루이스 포웰 대법관은 말년에 고향에서 항소심 판사로 활동한 바 있다.

senior judge가 되려면 ‘rule of 80’의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65세 이상으로 자신의 연령과 재직기간의 합이 80에 이르러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65세에 판사경력이 15년이거나, 70세에 판사경력이 10년이면 그 요건을 충족한다.

물론 senior judge가 그 직위를 계속 유지하려면 일정한 요건이 필요하다. senior judge는 현역판사 평균업무량의 3개월치에 해당하는 변론사건, 조정 및 신청사건을 처리하거나, 사법행정업무를 수행하고 해마다 연방대법원장 또는 관할 연방항소법원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이한 것은 법원과 관련된 행정업무는 물론 연방정부나 주정부를 위한 활동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경제적 이유로 변호사 개업을 위해 65세 이전에 판사직을 사임하는 연방판사들이 점차 늘고 있긴 하지만, 위 요건을 갖춘 대부분의 연방판사는 완전한 사임보다는 senior judge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senior judge로의 전출이 많아지면서 젊은 연방판사의 계속적 충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senior judge들의 존재는 법원 업무량 해소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senior judge의 수는 300여명으로 전체 연방판사의 약 30%에 해당하고, senior judge가 처리한 사건수는 작년 기준으로 전체의 약 18%에 해당하며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senior judge 제도는 판사들에게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사회에 환원하는 봉사의 즐거움을 주는 한편, 법원으로서도 사건처리 부담의 경감은 물론 신규 판사들에 대한 조언과 각종 위원회 및 외부 행사 참석 등 행정 업무 경감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판사들에게 아름다운 은퇴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노력에 너무 인색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에게는 퇴임한 판사들의 직업선택을 제한하기 위한 묘수 찾기보다 오히려 1919년 미국의 의회가 했던 것처럼 그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