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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헤이그통신] (13)재판부 운영의 실제 - 합의제와 주심

권오곤 ICTY 재판관

1. 글머리에

밀로셰비치 재판을 진행하던 시절, 필자가 주심인지 여부에 관해 질문을 자주 받은 적이 많다. 그러나 이곳 국제재판소에서는 준비절차(pre-trial) 단계에서 준비절차 담당 재판관(pre-trial judge)이 있을 뿐, 일단 재판이 시작된 사건에 관해서는 주심제도가 없이 모든 재판관이 동등하게 관여하고 있다. 이 기회에 이곳 재판부 운영의 실제를 살펴보면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모습에 관해서도 소개하기로 한다.

2. 재판부의 조직과 운영

가. 조직

ICTY 상임재판관(permanent judge)의 수는 16명이다. 이들 중 7명이 상소심 재판부(Appeals Chamber)를 구성하고, 나머지 9명의 재판관들이 3명씩 나뉘어 3개의 제1심 재판부(Trial Chambers)를 구성한다. 2001년도부터는 더 많은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유엔총회에서 27명의 임시재판관(ad litem judge)을 선출한 다음, 그들 중 한 때에 최다 10명까지의 범위 내의 임시재판관들을 임명하여 제1심 재판에 참여하게 하고 있다. 임시재판관은 본안재판이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임명되어 재판에 투입되기 때문에 이곳 실무와 판례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준비절차 과정에서 미리 짜여진 재판의 틀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적 제약이 있기는 하나, 재판절차에 관하여 생기는 모든 문제에 관하여 상임재판관과 전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그 밖에 장기간의 재판이 예상되는 사건에는 예비재판관(reserve judge)을 두고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2007년 1월 15일자 헤이그통신 ‘재판 도중 판사의 경질’ 참조).

나. 제1심 재판부

재판장은 재판관들 중에서 호선으로 선출되는데, 상임재판관 중에서 선출되는 것이 관례다. 재판장은 법정에서 재판절차의 진행을 주관하고, 기타 행정적 사항을 관장한다. 재판장이 아닌 재판관이 법정에서 당사자나 증인에게 질문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한 재판부는 준비절차의 경우에는 여러 건을 담당하지만, 본안재판(trial)은 1건만을 담당한다. 한 때 한 재판부가 2건 이상의 본안재판을 진행하는 것을 시도해 본 적이 있으나, 일단 재판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매일 재판을 계속하는 이곳의 실무에 비추어,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도 별로 없고, 재판관과 기타 실무자에게 혼란만 야기한다는 이유로 현재는 이용하지 않고 있다.

준비절차는 재판 시작 전에 본안전 항변에 대한 재판을 마치는 한편, 증거개시가 차질없이 이루어지게 하면서, 증인 숫자 내지 재판 소요기간을 결정하는 등 본안재판을 준비하는 절차이다. 준비절차를 담당하였던 재판부가 본안재판도 이어서 진행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으나, 쉬는 재판부가 있어서는 안 될 임시재판소의 현실적인 특성상 재판을 마친 재판부가 있으면 여기에 준비절차가 종료되어 있는 사건을 배당하여 곧바로 재판을 시작하게 하고 있다(속칭 에스컬레이터 법칙). 준비절차 중에는 재판장이 주심 재판관(pre-trial judge)을 지정한 다음, 필요적으로 재판부의 결정을 요하는 사항이 아닌 나머지 사항에 관해 그로 하여금 주도적으로 관장하게 하고 있다.

다. 상소심 재판부

개개의 상소사건은 7인의 상소심 재판관 중 재판소장이 지정하는 5인의 재판관이 담당한다. 7인의 재판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재판부 제도는 두지 않고 있다. 재판소장은 당연히 상소심 재판부의 재판장이 되지만, 재판소장이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는 관여 재판관들이 호선으로 정한다.

3. 재판관 사이의 합의

합의(deliberation)의 모습은 재판부마다 다르다. 법정에서 재판 진행 중에 구술로 제기되는 각종 신청이나 진행에 관한 이의는 재판관들이 즉석에서 합의를 하여 결정을 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밖에 더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재판소 밖에서도 접근이 가능한 이메일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고, 수시로 재판관끼리 만나 합의를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결정은 문구 하나하나까지 철저하게 축조심의를 한다. 최종 판결과 관련하여서는 평소 재판 진행 중 틈틈이 각 증인의 증언 요지와 법률문제를 정리해 놓은 다음, 재판 종료 후 이에 기초해 집중적으로 합의를 하여 결론을 도출하고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1~3개월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판관들은 각 1인의 전속 연구관과 수명의 공동 연구관들의 도움을 받는다. 한편 재판관들은 제1심의 본안판결뿐 아니라 개개의 중간 결정과 관련해서도 그 전부 또는 일부에 관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4. 맺으며

필자의 이곳에서의 경험상 합의 초기에 재판관 2인이 동의했던 사안에 관해 다른 재판관의 논거에 설득돼 결론이 바뀌게 된 경우도 적지 않고, 필자의 반대의견이 상소심에서 채택되어 결국에는 규칙개정에 이르게 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필자는 재판관들 사이에 서로의 지혜를 짜내는 토론과 타협을 통해 논거를 찾아내고 결론에 이르는 합의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의 합의제 재판 운영의 실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법이 합의제를 규정한 이상 관여 법관 전원이 동등하게 합의에 참여함이 그 정신에 부합하는 것일 것이고, 3인 중 2인이 동의한다는 이유로 나머지 1인의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하거나 주심이 아닌 법관이 사건에 대한 파악을 주심보다 덜 해도 된다고 한다면 법관 스스로가 법을 위반하거나 편법을 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