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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9) 법정에서의 언어

권오곤 ICTY 재판관

1. 서 언

국제 법정과 국내 법정의 차이점 중에 가장 크게 눈에 띠는 부분은 언어 문제이다. 재판에 참여하는 재판부, 검찰, 변호인, 피고인의 모국어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고, 심지어는 한 재판부내에서조차도 불어를 사용하는 재판관과 영어를 사용하는 재판관 사이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래에서 언어라는 창문을 통하여 국제 법정의 제도와 현실 그리고 당면한 기술적 도전과제를 간단히 살펴본다.

2. 공식 언어와 피고인의 권리

ICTY의 공식 언어(working language)는 영어와 불어이다. 이는 국제사법재판소(ICJ), 르완다 전범재판소(ICTR), 국제형사재판소(ICC),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SCSL) 등 다른 국제재판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재판관은 물론 모든 직원은 공식 언어 중의 하나에 숙달하여야 한다. 재판연구관 등의 직원 채용시 후보자가 두 언어에 모두 능숙하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변호인도 원칙적으로 재판소의 공식 언어 중 하나에 숙달하여야 하나, 예외적으로 정의 관념상 합당한 경우에는 이에 능숙하지 않더라도 피고인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 이러한 예외는 최근의 실무상, 주된 변호인(lead counsel)을 보좌하는 공동변호인(co-counsel)을 선임하는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피고인은 그의 기본적 권리로서,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공소장을 피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교부하여야 함은 물론이고, 모든 공판 진행은 피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동시통역 된다. 증거 개시(disclosure)에 있어서도 모든 증거서류를 피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피고인에게 미리 제공하여야 하는데, 한정된 인력으로 방대한 규모의 전범 재판을 여러 개 동시에 진행하여야 하는 재판소의 입장에서는 신속한 번역 문제가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 변호인 없이 스스로 재판을 진행하는 피고인의 경우에 있어서, 어디까지 번역을 해 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계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영어 및 불어로만 작성되는 공판속기록(transcript)은 이를 번역해 줄 필요가 없고, 대신 피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공판절차를 녹화한 테이프를 교부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판례가 확립되어 있다.

3. 전담 부서

ICTY에서는 이러한 언어 문제를 전담하기 위하여, 사무국(Registry) 내에 “Conference and Language Services Section (CLSS)”이라고 불리는 전담 부서를 두고 있는데, 여기에는 현재 약 15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고, 크게 ①문서의 번역, ②법정 및 법정 외에서의 통역, ③공판속기록 작성의 세 가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법정 통역에 있어서는 재판소의 공식 언어인 영어와 불어, 그리고 피고인 또는 증인의 언어, 이렇게 적어도 3~4개의 언어가 동시에 통역된다. 법정에는 각 언어별로 부스가 설치되어 있고, 각 부스마다 2~3인이 1조가 되어 서로 교대해 가며 통역을 하고 있다. 재판시에는 이들 통역사 및 속기사의 집중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매 90분마다 20분 전후씩의 휴식시간을 가지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ICTY의 속기록 작성 및 배포 시스템은 여러 국내 법원의 모델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짜여 있는데, 현재 전문회사에 외주를 주어 실시하고 있다. 속기록은 법정에서의 모든 발언이 말 그대로 기록되어 거의 실시간으로 (약 3~4초 정도 지연되어) 법정 및 법원 전체에 Livenote 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제공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재판관, 검찰, 변호인 모두 각자 별도로 쟁점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 표를 하거나 주석을 다는 것이 가능하고, 속기록 전체에 대한 다양한 검색도 가능하다. 재판에 참여하지 않는 사건 관계자도 반드시 법정에 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속기록을 볼 수 있고, 관련 자료 및 대응전략을 이메일을 통하여 법정내의 자신의 팀에게 보내기도 한다.

4. 수사상의 어려움

CLSS의 언어 지원은 수사단계에서도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 CLSS의 인력만으로는 이러한 언어 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검찰은 별도의 통역사, 번역사를 활용하고 있다. 2007년 7월 현재 검찰이 보유하고 있는 증거기록이 700만 페이지를 넘고, 그 대부분이 현지어로 되어 있어, 이를 파악하고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번역팀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인력낭비를 줄이기 위하여 실제로 재판에 쓸 문서만을 번역하도록 요청해 줄 것을 요구하는 데 반하여, 수사팀은 재판에 쓸 문서를 찾기 위하여 소위 투망식 번역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래된 난제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소위 광학적 문자인식(OCR)과 자동번역 시스템 등을 조합한 기술을 도입하여, 일단 기계적 번역을 통하여 개략적인 문서의 내용과 그 증거가치를 판별한 후, 법정에 증거로 제출할 부분만을 정확하게 선정하여 공인 번역을 요청하도록 하여, 한정된 번역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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