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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헌법판례열람

[미국헌법판례열람] 대통령과 사법부

임지봉 교수

미국에서는 행정부에게 ‘행정특권’(Executive Privilege)이라는 특권을 인정하고 있어 이채롭다. 즉, 권력분립의 원칙상 행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이 고도의 기밀성을 요하는 것일 때 행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정특권의 제한과 관련해 1974년 United States v. Nixon(418 US 683) 판결이 미국사회에서 큰 주목을 끈 바 있다.

연방 대배심(grand jury)은 미합중국을 기망하고 사법정의(司法正義)의 실현 방해를 공모한 혐의로 7명의 대통령 자문관들을 기소했다. 연방배심에는 연방 대배심(grand jury)과 소배심(petit jury)이 있는데 연방 대배심은 연방사건에 혐의자와 증인들을 출석시키고 증언을 들은 후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기소배심이며, 소배심은 구체적인 사건에서 12인 내외의 배심원들이 사실관계의 유무죄(형사사건), 손해배상 유무(민사사건)를 결정하는 일반적 의미의 배심을 말한다. 대통령 Nixon은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공모자로 이 대배심사건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특별검사의 신청으로 제3자 문서지참소환장(subpoena duces tectum)이 연방지방법원에 의해 발부되어졌는데, 그것은 Nixon대통령에게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참모들과의 회의에 관한 녹음테이프와 서류기록들의 제출을 명하고 있었다. 문서지참소환장이란 소환장에서 지정한 문서 등을 지참하여 증인으로서 출두해야 한다고 명하는 소환장을 말한다. 증거로 이용하려는 문서 등이 제3자의 점유 중에 있는 경우에 그 문서를 제출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소환장이다. Nixon은 절대적 행정특권과 관련된 사항임을 이유로 그 소환장 발부명령의 취소를 구하는 신청을 제기하였다. 그 취소신청은 기각당했고 이에 연방대법원에 의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된다.

Burger대법원장이 집필한 연방대법원의 법정의견은, 권력분립원칙이나 고위공무원간의 의사소통에 대한 기밀유지의 필요성만으로 어떤 경우에도 사법적 심사에서 제외되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행정특권을 누릴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다음은 그 추론요지이다.

연방대법원이 행정특권의 최종적 중재자이다. 첫째, 연방지방법원의 소환장 발부명령이 최종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대법원은 그 문제에 관해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이 사건이 임명된 행정공무원인 특별검사 대(對)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간의 행정부 내부 분쟁이라는 단순한 주장은 연방사법부의 관할권을 부정하는 이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재판가능성(justiciability)이 있다. 이 사건에서 행정부는 특별검사에게 행정부 내에서 독특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행정규칙을 집행할 것을 요구받았다. 권력분립원칙이 대통령의 특권 주장에 대한 사법부의 심사를 막지는 않는다. 법원이 헌법에 열거된 권력들로부터 유래하는 구체적 권력들에 대한 주장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연방정부의 주권적(主權的) 권력은 상호평등한 삼부(三府)에 나뉘어져 온 반면, 그 분리된 권력들은 절대적 독립성을 갖고 행사되도록 의도되지는 않았다. 사법절차의 정당한 필요들은 행정특권보다 더 중요하다. 정부정책의 형성이 기밀성을 요구하고 이러한 기밀성은 차례차례 대통령과 관련된 의사소통의 기밀성이라는 추정적 특권을 요구한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권이 군사상 혹은 외교상 비밀에 근거한 것일 때 최상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반면, 기밀성에 대한 대통령의 일반화된 이익에 그러한 존중을 주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소환장에 형사법정에의 지참이 명시된 자료들에 대해 특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기밀성에 대한 일반화된 이익들에만 근거하는 것일 때, 그것은 형사사법의 정당한 집행에서 적법절차의 근본적 요구들보다 더 중시될 수 없다. 하급심 판결을 인용한다.

소위 Watergate 사건을 다룬 이 판결이 미국사회에 던진 파장은 자못 컸다. 이 사건은 현직대통령인 Nixon이 탄핵사유에 해당하는 죄인 “미국을 기망하고 司法正義를 방해한 죄”(defraud the United States and obstruct justice)의 공모자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현직대통령의 형사적 범죄행위를 다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판결은 “어떤 사람도 법 위에 있지는 않다”는 오랜 격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연방대법원의 이 판결 직후 Nixon대통령의 사임 발표가 곧 잇따랐다. 3년 후인 1977년의 Nixon v. Administrator of General Services판결(433 US 425)에서도 Nixon대통령이 소송당사자가 되었다. 물론 이때는 Nixon이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였다. 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전직대통령도 제한적이나마 행정특권을 주장할 수 있음은 인정했지만, 전직대통령의 문서들이 의회가 정한 지침에 따라 차기정부에 넘겨졌고 그 지침이 행정특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면 전직대통령의 문서들을 검토하고 돌려줄 것을 규정한 ‘대통령의 기록과 자료보존에 대한 법률’은 합헌이라고 판시했다.

United States v. Nixon사건(줄여서 ‘닉슨사건’이라 부르기로 한다)은 대통령을 상대로 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1997년에 우리 대법원이 다룬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등에 관한 사건(大判 1997. 4. 17, 96 도 3376, 줄여서 ‘전노사건’이라 부르기로 한다)과 유사하다. 후자에선 현직대통령이 아니라 전직대통령이 문제되었다는 차이점이 존재할 뿐이다. 전노사건에서는 두 전직대통령이 군사반란죄, 내란죄, 뇌물수수죄의 혐의를 받고 있었고 닉슨사건에서는 ‘미국을 기망하고 사법정의를 방해한 죄’의 공모자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두 사건 공히 전현직 대통령의 형사적 범죄행위를 다루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닉슨사건에서는 대통령의 행정특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형사적 정의와의 치열한 이익형량 끝에 행정특권을 이 사건에 적용하지 않고 자료의 제출을 명령하였으므로 사법부가 적극적이고 진보적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노사건 판결과 유사하다. 그러나 닉슨사건은 미국 연방대법원에 의한 사법적극주의의 한 대표적인 예이지만, Political Question원칙이 아니라 ‘행정특권’에 관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전노사건과 다르다. Nixon v. Administrator of General Services사건도 전노사건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이 사건은 전직대통령이 사건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전노사건과 똑같고, 전직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행정특권을 누린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의회의 지침이 행정특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정특권의 적용을 거부하고 전직대통령에게 결과적으로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보면 전노사건과 유사하다.

지난 열흘여동안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헌법학자대회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불헌법학회를 다녀왔다. 이 짧지 않은 여정에서 필자가 느낀 것은 사람사는 세상은 어디든 참 비슷하고 법률가가 하는 고민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닉슨사건이나 전노사건처럼 전·현직 대통령이 연루된 정치적으로 민간함 사건들에 사법부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야 하느냐, 헌법에 선언된 국민 기본권 보장의 거룩한 정신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구체적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세계 각국의 헌법학자들은 똑같이 고민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강렬했던 그 학문적 세례를 오래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서강대 법대 교수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