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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헤이그통신] (8) 법정 변론

권오곤 ICTY재판관

1. 글머리에

민사 재판장 시절, 변론종결 조서에 마치 부동문자와도 같이 기재되는 “소송관계 표명”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형사재판의 최후변론과 같은 것이겠거니 나름대로 결론짓고, 대리인들에게 왜 자기가 이겨야 하는지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보라고 요청을 하면, 거의 모든 경우에 “다음 기일에 서면으로” 라는 답변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국제재판소에서 직접 재판을 하면서, 한국에서의 재판 모습과는 다른 것으로서 필자가 생경하게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법정에서의 변론이었다.

2. 심판(umpire)으로서의 판사?

필자가 배운 바로는 영미의 판사들은 마치 운동경기의 심판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서술은 증거조사, 특히 당사자에게 맡겨져 있는 증인신문에 관해서는 타당한 설명이다. 즉, 증인신문은 당사자의 주신문, 반대신문 및 재주신문의 순으로 진행되고, 재판부의 신문은 보충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일부 전통적인 대륙법계 출신의 재판관들은 아직도 직권신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미법계 출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재판관들은 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사건을 가장 잘 아는 당사자들의 소송전략에 맡겨 놓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재판관들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법정에서의 변론에 임해서는 180도 바뀌어, 재판관들은 언제든지 당사자의 진술 도중에 끼어들어 재판관 자신의 경향이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기까지 한 질문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것이 실무이고, 이러한 태도에는 영미법계 출신 재판관과 대륙법계 출신 재판관 사이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3. 밀로셰비치 사건의 추억

밀로셰비치에 대해서는 코소보 사건만이 기소되었다가, 그가 구속되어 헤이그로 이송되어 온 후에야 크로아티아 사건과 보스니아 사건이 추가 기소되었고, 그 후 코소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려고 할 무렵 검찰에서 위 세 사건의 병합을 신청함에 따라, 그 심리를 위하여 심문기일(hearing)을 연 적이 있다. ICTY에서 사건을 병합하기 위해서는 비록 동일 피고인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사실관계(same transaction)에 기한 것임을 요하는데, 과연 위 세 사건이 동일한 사실관계에 기한 것인지, 그리고 만약 병합한다고 하면 그 방대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이 쟁점이었다. 당시 ICTY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필자로서는 위 기일에서 당사자들의 주장을 듣고만 있었는데, 그 다음 날인 2002년 1월20일자 미국의 뉴욕타임즈 기사가 필자의 눈을 끌었다. 그 기사는 위 심문기일의 진행을 다루면서 영국 출신의 재판장은 이런 말을 하고, 자마이카 출신의 재판관은 이런 언급을 했는데 한국 출신의 또 한 명의 재판관인 필자는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것이었다. 이에 놀라 다른 재판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그들의 설명은 법률적 쟁점에 관해서는 증인신문의 경우와는 달리 재판부의 속마음을 미리 알려주어 당사자가 예상하지도 못한 결론 때문에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사자들의 답변 여하에 따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므로 재판부의 의중이 드러나는 질문을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4. 언제, 어떻게

가장 대표적인 법정 변론은 모두진술(opening statement)과 최후변론(closing argument)일 것이다. 특히 최후변론에 있어서는 재판과정에서 현출되었던 증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상대방의 주장 및 증거를 반박하며, 법률적 주장을 펴고, 재판부의 각종 질문에 답변을 하게 되는데 당사자별로 하루나 이틀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밖에 준비절차 또는 재판절차에서 제기되는 각종 신청이나 절차 진행과 관련하여 중요한 쟁점이 있는 경우, 수시로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변론을 열어 당사자의 주장을 들을 수 있다. 물론 당사자의 신청서 및 이에 대한 상대방의 답변서 등 서면으로만 처리하기에 충분한 경우에는 이러한 변론을 열 필요가 없다. 따라서 법정 변론에 있어서는 미리 제출한 서면을 그대로 읽는 경우는 없고, 이미 제출된 상대방 주장을 감안하여 이에 대한 반박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알기 쉽게 요약해서 이야기하고, 중간 중간에 재판부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정에서의 변론 내용은 “말해진 그대로(verbatim)” 속기되고, 그러한 속기록이 재판기록의 일부가 된다. 재판부가 그 결정이나 판결에서 당사자가 법정에서 말한 내용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도 각종 신청서나 항소이유서에서 재판관들이 법정에서 말한 내용을 인용하기도 한다.

5. 맺으면서

눈을 마주 보고 하는 말에는 글로써는 담을 수 없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에 직접주의, 구술주의가 재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들 중의 하나로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하고, 재판부의 석명에 따른 답변을 하면서 진행되는 법정 토론은 쟁점을 뚜렷이 부각시킨다. 재판부의 입장에서도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만 적절한 질문을 통하여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토론과정을 통하여 바람직한 결론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선진 문명사회의 모범적인 분쟁해결 방안이고, 토론문화에 아직 익숙지 못한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사법부가 사법절차를 통하여 그 패러다임을 정착시킬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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