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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헤이그통신] (7) 아! 이준 열사

권오곤 ICTY재판관

1. 글머리에

다가오는 7월14일이면 이준 열사가 이곳 헤이그에서 순국한 지 100년이 된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국제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유엔의 수장을 배출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실로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법조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이준 열사가 참석을 거부당한 바로 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체결된 헤이그협약 등의 법규를 적용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그 감회가 남다르다.

2. 고종의 특사 파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군비경쟁을 금지하고, 전쟁수단을 적정화하는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한 만국평화회의(World Peace Conference)가 1899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후 1907년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다시 헤이그에서 열리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고종 황제는 을사조약(1905)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3명의 특사를 파견한다.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으로서 평리원 검사였던 이준(48)은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1907년 4월21일경 서울을 출발,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37)과 합류한다. 의정부 참찬을 역임하였던 그는 1906년 북간도로 이주,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항일 민족정신의 고취에 진력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들은 다시 시베리아 철도로 생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여, 주미국 및 주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의 아들로서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주러시아 공사관 참사관이었던 이위종(20)과 합류한 후, 다시 기차로 베를린, 브뤼셀을 거쳐 6월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다. 요즘에는 서울에서 11시간이면 닿는 헤이그이지만, 이들 일행은 무려 두 달 가까이 걸려서 온 것이다. 그러나 회의는 이미 열흘 전에 시작하였고, 이들은 초청장을 소지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고 만다.

3. 헤이그에서의 활동

(1)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

이준 열사 일행은 회의장 입장이 거부되자,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불어로 된 호소문을 배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호소문은,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장 병력을 사용하여 고종황제의 승인 없이 체결한 것으로서, 국제법에 위반되어 무효라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1907년 6월30일자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가 이를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제목 아래 보도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다. 위 평화회의보는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ad)가 편집인으로 발행하고 있던 것인데, 그는 이후 이준 열사 일행과 인터뷰를 하고, 이들의 기자협회 연설을 주선하기도 하는 등 그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2) 축제 때의 해골

1907년 7월5일자 평화회의보는, 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허무를 일깨워 주기 위하여 잔칫상에 해골 하나를 놓아두는 이집트인들의 관습을 상기하면서, 회의장의 닫힌 문 앞에 앉아 있는 이준 열사 일행이 옛날 이집트 해골의 현대판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학식이 깊고, 수개국어를 말하며, 철저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인물”이라고 묘사한 이위종과의 인터뷰를 게재하였는데, 그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여기서 무얼 하나?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나?”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헤이그에 있는 법과 정의의 신의 제단에 호소하고 이 조약이 국제법상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요청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의란 없다는 얘기인가, 여기 헤이그에서조차도.”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의, 권리 그리고 법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정의에 관해서 나에게 이야기하지 마라. 당신은 소위 평화주의자가 아닌가? 대한제국은 무장하지 않은 나라였다. 대한제국은 평화롭게 그리고 조용히 살아갈 것만을 원했다. 우리는 당신들 평화론자들이 전도하는 것을 실천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내가 여기 이 문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칼을 신뢰하는 대신에 법과 정의와 평화의 신에게 신뢰를 갖고 있는 모든 나라들을 기다리는 운명의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4. 이준 열사의 사망

그 후 7월8일에는 이위종이 기자협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1907년 7월14일 이준 열사가 숙소인 드용 호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만다. 그 사인에 관하여, 국내에서는 동경으로부터의 전보를 인용하여 보도한 1907년 7월19일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기사로 인하여 할복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할복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평화회의보와 일부 네덜란드 신문은 수술을 받은 뺨의 종기 때문이라고 보도하기도 하였으나, 이위종은 이후의 인터뷰에서 그 가능성을 일축하여, 사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5. 맺는 말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국제분쟁을 중재로 해결하기 위하여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PCA)를 창설하기로 의결한 바 있다. 이준 열사 일행의 헤이그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던 스테드는 미국의 철강재벌 카네기를 설득, 그로 하여금 당시 150만불을 쾌척하여 상설중재재판소(PCA)가 들어갈 평화궁(Peace Palace)을 짓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스테드의 동상도 들어서 있는 이 평화궁은 현재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사용하고 있는데, 이준 열사의 100주기를 맞이하여 앞으로는 평화궁에 근무하는 한국인 재판관도 배출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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