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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헤이그통신] (3) 공소장일본주의의 실상과 허구

권오곤 ICTY 재판관

1. 공소장일본주의의 유래와 의의

형사소송규칙 제118조 제2항은 공소장에는 “사건에 관하여 법원에 예단이 생기게 할 수 있는 서류 기타 물건을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함으로써, 영미의 재판에서 유래한 공소장일본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전통적인 대륙법에서는 수사단계에서의 증거수집은 법원 내의 搜査 담당 판사(investigating judge)가 담당하며, 재판시에는 일건 기록(dossier)이 통째로 제출되어, 법관이 이에 기초하여 직권 서면심리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에 비하여, 영미법에서는 수사 및 증거수집은 당사자, 즉 독립된 검찰이 담당하고, 재판시 사실 인정은 배심원에게 맡겨져 있으며, 판사는 절차를 진행하는 중립적인 심판(umpire)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소장일본주의는 판사의 중립성,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판사가 사건에 관한 예단을 가지지 않도록 재판 시작 전에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 본거지인 영미에서는 이에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용어가 없고, 따라서 다분히 일본식 造語인 것으로 보이는 이 공소장일본주의라는 용어가 가질 수 있는 함축으로 인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되게 오해되기도 하는 것 같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와 한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 증거 개시(開示)와의 관계

공소장일본주의는 법원과의 관계에 있어서 판사 내지는 배심원이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공판에 임하게 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인정되는 것일 뿐, 피고인에 대한 증거 개시(disclosure)는 이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나라도 비준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협약’ 제14조 제3항은 피고인의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으로서, ‘범죄 혐의의 성질과 이유에 관하여 신속하고도 상세하게 통고를 받을 권리’ 및 ‘방어의 준비를 위하여 충분한 시간과 편의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바, 이에 따라 검찰이 피고인에게 범죄혐의와 관련된 증거를 개시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법의 일반 원칙으로까지 승화된 당연한 강제규범(jus cogens)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한 나라의 사법부에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표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서면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는 경우

영미에서도 수사단계에서 수사기관이 증인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지만, 재판시 이러한 서면 진술서가 검찰측 증거로 제출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고, 모든 증인의 증언은 법정에서 말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방대한 규모의 전범 및 반인도적 범죄 사건을 다뤄야 하는 이곳 ICTY에서는 절차의 실효성을 위하여 영미법계와 대륙법계 재판의 절충을 꾀하여 증인의 서면 진술서를 일정한 요건 아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요건이 충족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허용할 것인지 여부 또는 사안의 중요성 등에 비추어 그 증거신청을 아예 배척하고 당해 증인으로 하여금 직접 구두로 증언할 것을 명할 것인지 여부 등에 관하여 재판부가 재량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증인의 서면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고자 하는 신청이 있는 경우에는 재판부가 그 채택 여부의 판단을 위하여 진술서 내용을 미리 읽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한도에서는 ‘법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공소장일본주의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4. 준비절차(pre-trial)와의 관계

이곳 ICTY에서는 각 재판부가 각 1건의 본안 재판을 진행하면서 각 준비절차사건을 나누어 동시에 관장하고 있는데, 사건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처리를 위하여, 나중에 실제로 재판을 맡게 될 재판부가 준비절차까지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이에 반하여 ICC에서는 별도의 예심재판부를 두어 공소장의 인가 및 준비절차를 담당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제의 재판을 담당할 재판부가 준비절차까지 담당하게 되면, 준비절차에서 일어나게 되는 각종 본안전 항변, 증거 개시, 진술서에 대한 증거신청 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건에 관한 자료를 접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준비절차를 마무리하면서 제출하게 되어 있는 재판전 변론요지서(pre-trial brief)에는 각 주장 및 증거의 요지를 기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한도에서도 공소장일본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5. 맺는 말

요컨대, 공소장일본주의는 모든 증거가 법정에서 현출되는 전형적인 영미식의 재판에서 ‘법원과의 관계’에서 있어서만 그 의의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경우에도 피고인에 대한 증거개시의 문제는 이와 전혀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 그리고 증인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서가 증거로 제출되는 경우에는 그 증인의 증언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라도 재판부가 이를 미리 읽어야 하고, 이것이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와도 부합하는 것이다(다만, 피고인에게는 재판시작 전에 방어에 필요한 충분한 기간을 두고 증거를 개시하여야 하지만, 재판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재판부가 당해 증인의 증언을 듣기 전에 진술서를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 여유만 두고 제출하면 충분하다.). 최근 공판중심주의와 관련하여 증거 분리제출 제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는 것으로 듣고 있는데, 증거 분리제출은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것이 법원뿐만 아니라 피고인에 대하여도 법정에서 증거로 제출하는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재판을 깜짝쇼로 만드는 소극(笑劇)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