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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통신

[헤이그통신] (1) 피해자와 증인에 대한 배려

권오곤 ICTY 재판관

1. 글머리에

형사합의 재판장 시절, 이혼 후 어린 남매를 키우던 피고인이 딸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피해자 남매로부터 “아버지가 구속된 후 냉장고가 비고, 집안에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원래 착한 사람인데, 술을 마셔서 실수한 것일 뿐이니, 용서해 달라”는 탄원서를 받은 적이 있다. 개가하여 다른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있던 친모(고소인)는 자신의 사정 때문에 이들을 도저히 맡아 기를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달리 이 남매를 돌봐줄 사람도 없는 것 같아서 난감해 하다가, 결국에는 “눈을 딱 감고” 중형을 선고하고 말았지만, 왜 국가나 사회에서 이런 아이들을 맡아서 길러주는 제도적 장치가 없을까 하고 아쉬워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 피해자와 증인의 역할

형사재판의 목적 중의 하나는 피해자에게 정의를 실현하여 주는 것이다. 재판을 통하여 진실을 밝히고, 범죄자를 처벌함으로써 피해자로 하여금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 실현’에 대한 믿음이 ‘공정한 재판’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법(司法)에 대한 신뢰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한편 피해자는 증인이 되어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함으로써, 형사절차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3자가 증인이 되는 경우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증인이 사법기관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경우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와 증인에 대하여 지원과 보호 등의 배려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청이다.

3. ICTY의 경우

필자가 몸담고 있는 ICTY는 이러한 피해자와 증인에 대한 지원과 보호의 면에 있어서는 가히 선구적이다. 재판소가 범죄지인 발칸반도와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하여 증인들이 장거리여행을 해야 하고, 서구적 재판제도에 익숙하지 않아 자세한 안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밀로셰비치를 축출하였던 총리가 암살당하기도 하고, 증인이 보복 살해되기도 하는 등의 불안한 정세로 인하여 증인 보호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재판소 사무국에는 피해자와 증인에 대한 지원 및 보호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서를 별도로 설치하여 그 독립성,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가. 지원업무

가장 기초적인 지원업무는 증인의 거주지역으로부터 헤이그까지의 여행 및 귀환, 헤이그 체재 기간 중의 숙식 문제 등을 해결해 주고, 재판 절차 특히 증언과 관련된 제반 소송규칙과 실무 내용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그밖에도, 예컨대 성폭행이나 기타 잔혹한 범죄로 인한 정신적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인의 경우에는 심리상담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하고 있고, 보호를 요하는 어린이나 노약자 등의 피부양자 때문에 헤이그로 여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에는 이들 피부양자를 직접 돌봐주는 편의를 제공하기도 한다.

나. 증인 보호조치

아직도 인종간의 갈등의 소지가 남아 있어 증인이 위협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증인을 보호할 필요성이 큼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ICTY 재판은 발칸지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보호조치는 피해자나 증인의 신원이 공개되지 아니하도록 가명을 사용하고, 방송시 얼굴 및 음성을 변조하는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와 같은 경우에는 아예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증인의 신원을 일반에 누설하는 행위는 법정모욕죄로 처벌받게 된다. 내부 고발자의 경우와 같이 증인 신변에 대한 위협이 극심한 경우에는 증인과 그 가족을 서방국가에 정착하여 살게 하는 재배치(relocation) 프로그램까지 운영하고 있다.

다. 피고인과의 관계

증인의 신원을 보호하더라도, 이를 피고인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다만 증인 보호의 필요성이 절실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법원의 허가를 얻어 일정 기간(예컨대 증인의 증언 예정일 30일전까지) 그 개시(開始)를 지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당해 증인의 진술조서는 증인의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만 삭제하여 피고인에게 개시하였다가, 법원이 정한 시기에는 온전한 내용을 개시해야 한다.

4. 마치면서

이러한 예에 비교해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증인과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는 증인이 법원에 와서 법정에 찾아오는 방법, 증인의 역할과 증언 방법에 대한 안내에서 시작하여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경우와 같이 전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상담과 안내, 조폭 사건의 피해자와 같이 보복 위협이 있는 증인에 대한 보호 등의 문제들을 그냥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해자의 직접적인 형사절차 참여권을 인정하고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경우까지 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ICTY와 같이 법원내에 적어도 피해자 및 증인 문제를 담당하는 전문 부서를 설치하여 장기적으로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NGO 등과 연계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젊은 후배 판사님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법운용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글머리에 적은 것과 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사건을 떼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피해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법부의 역할이 국민을 섬기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증인과 피해자를 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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