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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칼럼] 노자와 한비자가 공유한 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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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자. 다음 구절은 중국 사상가 중에서 누가 한 말일까?

“도(道)는 만물의 시작이며 가치를 판단하는 근원이다. 이 때문에 눈 밝은 군주는 그 근원을 지켜서 만물의 근원을 알고 이 근원을 다스려서 선악을 구별하는 단서를 안다. 그래서 텅 비고 고요한 태도로 만물을 대하니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세상일이 스스로 결정된다.”

중국 철학에 관해 조금이라도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노자”라고 답할 것이다. 이 말만 놓고 보면 그 취지가 정확히 노자 말과 합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답은 “한비(韓非)”이다. 물론 ‘한비자’라는 책은 한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저술한 책이라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필자는 예전에 사마천 ‘사기’ 열전을 읽다가 ‘노자 한비 열전’에 이르러 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 사마천은 성향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두 사람을 같은 열전에 묶어서 다룬 것일까? 어떻게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내세우는 노자와 법치(法治)를 내세우는 한비가 같은 부류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최근에 ‘도덕경’ 풀이 작업을 마치고서 다시 ‘한비자’를 꼼꼼히 읽어 보니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하긴 최근에 다시 ‘노자 한비 열전’을 정독해보니 사마천도 그에 관한 답을 적어 놓고 있었다.

“한비의 학문은 황제(黃帝)와 노자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 고대 중국에서는 황로학(黃老學)이라고 하는데 특히 한나라 초기 문제(文帝)가 이를 신봉하며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노자가 황로(黃老)로 불릴 때와 노장(老莊)으로 불릴 때는 크게 다르다. 황로(黃老)의 황제(黃帝)는 전설상 인물이기는 하지만 법률 제정자의 상징이다. 따라서 법가(法家)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나라 인물인 사마천은 여기에 익숙했기에 자연스럽게 노자와 한비를 한 범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 의문은 ‘어떻게’이다. 어떻게 노자와 한비가 같은 사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군신(君臣) 관계에 있었다. 한비는 처음부터 신하의 학문을 표방했다. 반면에 최근 풀이 작업을 마친 ‘도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왕학, 그중에서도 군왕의 심술(心術)에 관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치술(治術)은 빠진 제왕학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제왕학이라는 잣대로 노자와 공자를 비교할 경우 노자에게는 치술이 거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비자’를 꼼꼼하게 읽어보니 거기에 답이 있었다. 주도(主道) 편은 말 그대로 군주의 도리에 관한 장인데 내용은 고스란히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에 대한 풀이로 채워져 있었다.

“군주는 지혜로워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모든 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를 알게 하고, 현명하면서도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신하들의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살핀다. 또한 용기가 있어도 분노하지 않아서 신하들로 하여금 용맹함을 마음껏 발휘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지혜를 사용하지 않아도 총명함을 갖게 되고 현명함을 사용하지 않아도 공로를 얻게 되면 용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강함을 갖게 된다. 신하들은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고 모든 관리들은 일정함을 갖게 된다. 이에 군주는 신하들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그들을 부린다. 이를 습상(習常)이라 한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마치 자리에 없는 듯이, 혹은 백성들이 그가 있음을 모르는 듯이 고요히 지낸다."

주도 편은 바로 이런 식으로 신하의 법가와 임금의 무위자연이 연결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좋게 보면 치술이 약한 노자 사상을 한비의 법가가 보완하는 방식이라 하겠다. 물론 노자 자신이 이런 한비자식 보완을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은 별개 문제라 하겠다.

그런데 군신(君臣) 차원을 떠나서 노자의 무위자연과 한비의 법가는 근본정신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公), 그것도 지공(至公)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억지로 뭔가를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자는 것이다.

요임금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효도로 이름난 순임금에게 선위(禪位)한 것이 노자가 볼 때 대표적인 무위자연이다.

법가의 출발점 또한 공(公), 그것도 지공(至公)이다.

지공(至公)의 정반대 편에 있는 것이 ‘내로남불’이다. 그리고 ‘내로남불’ 반대편에 ‘공정과 상식’이 자리할 터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내로남불에서 얼마나 벗어났으며 공정과 상식에 얼마나 가까이 갔을까? 여러 문제들을 들어 짚어볼 때이다.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