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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설날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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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사라지면 힘이 생긴다. 그 자리에 희망이 대신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무언가 예측이 가능할 때 안정이 찾아온다. 어둠 속에서는 두렵지만, 보이면 힘이 난다. 미래의 청사진이 던져 주는 심리적 시각 효과의 힘으로 저마다 아침에 일어난다. 따져보면 한낱 기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삶의 동력이 되는 셈인데, 희망의 알을 품은 꿈의 새처럼 인간은 허망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다. 그래도 그 꿈을 어느 정도나마 현실로 부화하는 능력을 자신의 실질의 일부로 자부한다.

신년 벽두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기에 제격이다. 대부분 힘을 얻는다. 그러나 두어 주 보내면서 계획이 어긋나다 보면 금세 맥이 빠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은 반갑기 그지없다. 신정에 이어 구정이라는 옛 이름으로 한 해의 출발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서력기원만 사용하는 국가에 비하면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 새해를 두 번 맞을 수 있으며, 시작의 유리한 점을 한 번 더 이용할 수 있다.

새해의 출발점을 양력이든 음력이든 1월로 삼으면, 그 마지막은 12월이 된다. 1월에 서서 12월의 끝을 바라보는 행위를 전망 또는 계획이라 부른다면, 그 기획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2월을 저 높은 곳에 위치한 목적지로 상정하는 것이다.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힘들여 오를 때 성취감을 얻을 터이다. 다른 하나는 12월을 멀리 아래쪽에 놓인 보금자리로 여기는 것이다. 계단이 반드시 위로 오를 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려가는 방식으로 1년을 설계하면 된다. 1년의 여정을 정상에서 하산하듯 걸어가도 설정한 지점에 닿을 수 있다.

인간의 미래는 자기가 원하는 미래와 운명적 미래로 나뉜다. 12개든 365개든 개인의 전망을 실행해 나아가는 1년에 비유한 계단 오르내리기 방식이 그 두 가지 미래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위로 오르든 아래로 내려가든 1년의 전망은 자기가 원하는 미래에 속한다. 위나 아래는 목표 지점이 바라보이는 곳에 놓여 있다. 살아가는 과정을 오르는 방식으로 선택할 것인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내려가는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는 저마다의 사정과 개성 그리고 취향에 달렸다.

어제의 꿈이 내일의 한숨이 될지언정
우리는 오늘을 걷기 위해 또 새날을 맞는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은 부류에 속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된 운명의 길인 양 하루하루를 견뎌야 한다. 정초에 서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섣달은 목표도 아닐 뿐더러 저 위나 아래에 있지 않다. 일직선의 평면 저쪽 어딘가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목표를 가린 것은 가질 수 없는 건물과 차량 그리고 경쟁 상대로는 버거운 수많은 인파다. 출발점과 목표점 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은 헤치고 나아가야 할 풍파다. 온갖 혼잡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불안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도 힘이 생기지 않는다. 출발선에 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이 불안한 사람들로 가득한데 혼자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는 귀족이나 다름없다. 개인의 심리 상태를 지배하는 사회 계급을 없애려면, 아침에 힘을 얻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불안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의 제도와 정책은 그 기억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도록 배려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모든 국민을 앞이 보이지 않는 경쟁의 지평선 위에 세운다고 의회와 정부가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 존 데스먼드 버널이 주장하듯 인간의 이성은 자기가 원하는 미래와 운명적 미래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세상과 싸우듯 살아가야 한다. 어제의 꿈이 내일의 한숨이 될지언정, 우리는 오늘을 걷기 위하여 또 새날을 맞는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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