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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대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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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3년 동안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고아한 선비 같던 할아버지가 치매로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참 고통스러웠다. 능숙하게 쓰던 글자가 떠오르지 않아 붓을 멈추고 한참을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계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 아마 당신은 아셨던 것 같다. 머릿속이 깜깜해지는 깊은 수렁 속에 빠졌다는 사실을. 앞으로 더 자주 이런 경험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변호사가 되어 치매 발병이 원인이 된 사건들을 수행할 일이 더러 있었다. 자녀들 사이에 이미 재산 분쟁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자녀들이 부모의 성년후견개시심판청구를 하고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선임된 성년후견인을 채근하여 증여무효소송 등을 하거나, 증여무효소송을 먼저 제기하고 이어 성년후견개시심판청구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부모가 일부 자녀에게만 재산을 증여하여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 형제가 치매에 걸린 부모를 모시고 은행마다 다니며 현금을 인출해 간 것을 뒤늦게 알고 분통을 터트리던 사람, 형제가 치매에 걸린 부모를 지방 요양원에 입소시키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주지 않아 부모를 찾아 나선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소송에 나섰다.

 

그러나 성년후견개시 전에 있었던 부모의 결정을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다. 결정 당시에 의사무능력 상태였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능력이란 자신의 행위의 의미나 결과를 정상적인 인식력과 예기력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 내지는 지능을 말하는 것으로서 의사능력의 유무는 구체적인 법률행위와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대법원 2009. 1. 15. 선고 2008다58367 판결 등 참조).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증여 당시에 증여계약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정신적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보통은 정신감정을 신청한다. 법률행위 당시의 정신능력에 대한 감정이기 때문에 과거의 의료기록, 영상 등을 판단 자료로 삼는다. 치매는 장기적으로 서서히 악화되지만 하루하루 호전과 악화가 반복된다고 한다. 증여 무렵 어떤 상태의 의료기록이나 영상들이 남아있는지에 따라 감정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소송은 소송대리인 입장에서도 쉽지 않다. 가족 간의 소송에서는 어느샌가 법률 싸움보다 감정 싸움이 될 때가 많다. 법상 의미가 없는 쟁점이니 다투지 말자고 의뢰인에게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상대방이 써낸 서면에서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르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주장이 있으면 반드시 반박해야 한다. 어느 소송에서는 나도 의뢰인에게 동조되어 판사 앞에서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배우자가 시어머니의 장례식에 오지 않은 것을 비난하며 부모로부터 증여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외쳤다. 정작 쟁점은 증여 당시 아버지의 의사무능력 여부이었건만. 판사님이 말려 언쟁이 중단되었지만 그 소송에서 이긴 것은 두고두고 통쾌하다. 그러다가 문득 치매에 걸린 부모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자녀들이 내 건강상태, 내 재산 처분에 대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알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무엇을 후회할까.

 

최근 금융감독원이 의뢰한 고령금융소비자 보호 방안 연구에 참여했다. 해외에서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는 고령금융소비자 보호 방안을 파악해서 국내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연구였다. 나이가 들면 신체적 기능의 저하뿐만 아니라 적응능력, 인지능력 등의 저하, 행동유형의 변화 등을 경험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고령자의 삶의 질이 저하된다. 특히 고령자는 금융거래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끼거나 금융사기 등에 노출될 수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 외국의 사례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의 사전지정 제도(Social Security Advance Designation)였다. 사회보장제도 가입자와 수급자들이 자신의 급여를 관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 급여를 관리할 사람을 미리 지정해 두는 것이다. 민법상 위임계약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제도는 일반적 위임계약과 달리 정부나 기관의 주도하에 시행되고 관리자의 관리 개시 시점이 정부나 기관에 의하여 일률적으로 설정된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다. 이 제도를 고령금융소비자의 비상시 금융 관리인 지정 제도로 확대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치매 등으로 정신능력이 상실될 때를 대비해 금융기관이 관리자 지정의 방법과 절차를 알려주고 간편하게 지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안심되겠는가. 내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예금 인출을 못해서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문제는 관리자의 배임 또는 선관주의의무 위반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위임인이 고령에 정신능력이 상실되면 관리자를 누가 감독할 것인가. 결국 이 제도를 도입하려면 관리자 감독에 대한 기준과 절차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

 

이 제도 도입을 검토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과연 누구를 관리자로 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되었다. 자녀에게 맡길 것인가. 그럼 자녀 중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자녀들이 서로 싸우지 않겠는가. 남편에게 맡길 것인가. 남편이 나보다 먼저 치매에 걸리면 어찌하는가. 치매에 걸린 나를 두고 뒤늦게 바람이라도 나면 어쩌겠는가. 누구를 지정하든 썩 든든하지가 않다.

 
결국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한다. 할아버지의 치매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치매 염려증을 만들었다. 기사에 치매에 좋다는 음식이 있으면 찾아서 먹고, 치매 치료에 획기적인 연구가 발표되었다고 하면 꼼꼼히 읽어본다. 깜빡 기억을 못하는 일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치매 자가 진단표를 찾아 점검해 보고, 매년 건강검진 항목에서 뇌CT 검사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러다가 치매에 걸리면? 어쩔 수 없다. 그 전에 가족을 더 사랑하고 표현하고 행복하다가 가족들이 치매에 걸린 나를 내팽개치지 않고 나를 계속 사랑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김은경 변호사 (법무법인 대륙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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