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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를 위한 해묵은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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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판정 전후로 국제분쟁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가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온다. 한데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는 나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또 나올 것 같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잊을 만하면 등장하던, 해묵은 주제다.

몇 달 전 다른 나라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 프로젝트에 자문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얘기했던 것이지만 개별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방법과 국가의 총체적 대응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 간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어떻게 하면 ‘대응팀’을 잘 구성하여 적절한 리소스를 투입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일단 팀이 갖춰진 뒤에는 이를 얼마나 체계적·안정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을 지의 문제가 된다. 더욱 어려운 것은 후자(국가의 총체적 대응역량 강화)인데,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제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국가의 체질’이란 국제분쟁 전문가가 자생적으로 육성될 수 있는 ‘생태계’를 의미한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역량배양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관련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국내 로펌에 더욱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인재가 몰리고 경험이 축적되어 역량이 깊어질 것이다.


먼저 우리 기업의 국제계약 체결 관행이 바뀔 필요가 있다.
지난 20여 년간 대한민국의 국제분쟁 대응역량은 민-관을 막론하고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국제분쟁에서 해외 로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내 로펌의 역량 강화를 위한 부담을 우리 기업이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 기업이 국제분쟁에 더욱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내 로펌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사안의 쟁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기업 담당자들과 국내 로펌의 전문가들 간에 ‘긴밀한’ 협업을 통한 시너지는 해외 로펌과의 일방적인 소통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시너지는 종종 답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사건에서도 승소의 실마리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방대한 분량의 증거자료들이 국문으로 되어 있는 사건에서 해외 로펌에만 의존해서는 깊이 있는 논리 개발이 어렵다. 결국 우리 기업이 국내 로펌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기업과 로펌 모두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 기업들의 계약체결 관행에 있다. 국제계약을 협상할 때 우리 기업들이 외국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조항들이 있다. 바로 준거법(governing law) 및 분쟁해결과 관련된 조항(dispute resolution clause)들이다. 준거법 조항은 계약의 효력 및 해석, 이행을 어느 나라의 법에 따라 규율할지를 정하는 것이고, 분쟁해결조항은 계약과 관련된 분쟁 발생 시 어느 나라에 소재한 법원 또는 중재기관에서 해결할지를 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계약 당사자들 중 협상력이 우월한 측은 자국법에 따라, 그리고 자국 소재 기관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협상력의 우위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제3국 법에 따르거나 제3국에서의 절차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기로 타협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의 경우 협상력이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는 경우에조차 준거법과 분쟁해결 조항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를 빈번히 찾아볼 수 있다. 우리 기업의 협상력이 주로 열세였던 과거에 형성된 관행인지, 아니면 다른 거래조건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기업문화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준거법과 분쟁해결 조항을 쉽사리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계약의 이행과 관련해 발생하는 문제의 대다수가 협상으로 해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국제계약의 준거법이 우리 법일 경우 계약의 이행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의 해결을 위한 협상이 유리해진다. 분쟁해결조항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의 절차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도록 규정된 경우 상대방은 법적 절차를 통한 분쟁해결을 꺼리기 마련이다. 협상을 통한 분쟁해결에 끝내 실패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계약상 우리나라 법이 준거법이고 대한상사중재원의 국제중재규칙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국내 로펌을 추가 선임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에 비해 우리 기업은 국내 로펌만을 선임하여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 기업의 계약체결 관행을 바꾸면 기업 스스로에게 득이 된다는 뜻이다. 국내 로펌에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고, 그에 따라 국가 전체의 대응역량이 강화되는 것은 외려 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분쟁시 국내로펌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국제계약 협상시 준거법 조항 포기 말아야
상사중재원 지원 등 중재산업 발전에도 노력해야


정부 또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정부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정부는 WTO 분쟁이나 ISDS와 같은 여러 대형 국제분쟁의 당사자로서 국내 로펌을 적극 활용해왔다. 또한 다수의 민간 전문가들을 분쟁담당 공무원으로 채용하여 민-관 간에 경험과 전문성이 순환될 수 있도록 안배해왔다. 이 바람직한 기조는 앞으로도 마땅히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제공법분쟁을 담당하는 내부 부서를 강화하는 것과 국내 로펌에 대한 ‘사건 제공자’로서의 직접적 역할 외에도, 정부가 대한민국의 분쟁대응 ‘체질’ 강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국내 유일의 상설 법정중재기관인 대한상사중재원(KCAB)의 선진화를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대한상사중재원의 국제중재규칙에 따라 국내에서 진행되는 국제분쟁의 종류와 숫자가 늘어날수록 우리나라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굳이 이유를 댈 필요도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 우리 기업이 국제계약의 분쟁해결조항을 정할 때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규칙을 통한 분쟁해결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첫째이고, 계약 상대방이 이를 수용하는 것이 둘째이다. 첫 번째 조건의 당위성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으나, 두 번째 조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의 협상력 외에도 크게 두 가지의 보편적 인식이 필요하다. 하나는 대한상사중재원이 세계 유수의 국제중재기관들 못지않게 국제중재절차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 국제중재에 친화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인식을 제고하는 것은 사실상 전적으로 대한상사중재원의 역할이다. 법무부는 이미 지난 2019년부터 ‘중재산업 진흥 기본계획’을 시행하여 중재산업 발전을 위한 여러 지원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과연 대한상사중재원의 선진화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있을까 싶다.

근래 홍콩이 아시아지역 경제 허브로서의 입지를 위협받으면서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와 함께 전통적으로 아시아 국제중재시장을 양분해온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홍콩국제중재센터가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CIETAC)의 홍콩지부에 밀리게 될 것이라는 평가도 들린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가 국제중재시장에서 전성기 홍콩국제중재센터와 같은 위상을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홍콩국제중재센터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현재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보고 있는 기관은 당연히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중재산업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면 대한상사중재원이 아시아 2위의 국제중재기관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실현 가능해진, 바로 지금이다.


정하늘 외국변호사(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