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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창] 청승과 국뽕을 넘어서 : 김환기 점화(點畵)의 국제적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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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점화 평론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김환기의 점 하나하나에는 가족, 친구,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있고, 자연의 영원을 시적으로 풀어낸 한국미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설이 나오게 된 것은 김환기가 남긴 일기의 일부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일기에 외국 생활에서의 외롭고 센치한 심정을 토로했고, 달항아리와 한국적 미에 대한 예찬을 적었다. 그런 구절만 선택적으로 뽑아 놓으면 마치 김환기가 고국에 대한 애련함으로 한국적 순혈성을 지키다가 점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일기 전체를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외국 작가들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그들의 강점을 흡수하려는 예술적 열의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늙은 피카소가 매일 아침 한바탕 춤을 추며 명랑한 기분으로 무장한 뒤 작업실에서 투우사처럼 싸우듯이 그림을 그린다는 기사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달콤한 문학적인 것으로만 (예술을) 여겨왔는데 예술과는 싸워야 한다”며 “(피카소는) 발견하고 표현하고 그다음엔 파괴해 버리면서 자꾸 전진해 나가고 있다”고 썼다. 김환기의 작품이 변화해간 데는 서구 미술과의 이런 정신적 대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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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왼쪽) <파울 클레, Ad Parnassum, 1932년> 
(그림2, 오른쪽) <김환기, 1-VII-71 #207, 1971년>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그런데 국내 대부분의 평론에는 이런 김환기의 모습이 쏙 빠져 있다. 아마도 어려운 처지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한 사회적 동정을 유발하고 한국 문화의 순수성과 창조성을 강조하고 싶은 평론가들의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청승과 국뽕을 배경 음악으로 까는 미술 해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김환기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작품을 만든 외국 작가를 찾아 이들 간에 ‘미술적 대화’를 만들어줘야 김환기의 점화가 세계성을 가지며 더 빛날 수 있다.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를 보자. 클레는 원래 사실 묘사에 뛰어난 소묘(drawing) 작가였다. 김환기가 파리, 상파울로, 뉴욕 생활을 거치며 작품이 변했듯이, 클레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살다가 북아프리카, 이태리를 여행하고 독일로 옮겨 오면서 점차 대상을 간략하게 그려갔다. 그가 능숙하게 다루던 자세하고 복잡한 선(線)들도 추상적으로 증류되어 나갔다 (김환기의 일기에는 1958년경 파리에서 클레의 드로잉을 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울에 있는 딸에게 쓴 편지에서 클레의 소묘가 “아름다운 장난이자 갖고 싶도록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고 했다.)

클레는 1930년경 점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선은 점이 산책나간 것(A line is a dot that went for a walk)”이라며 점과 선의 관계를 유머스럽게 설명했다. 김환기가 이 말을 들었다면 단번에 이해했을 것이다. 클레의 점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Ad Parnassum'이다 (그림1). 이집트 여행을 갔다 와서 받은 느낌으로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하나하나 찍은 점으로 그렸다. 클레의 점은 서양화 붓으로 눌러 찍어서 네모진 형태인 반면 김환기의 점은 동양화용 뾰족한 서예 붓으로 찍어 동그란 형태다. 클레에는 태양, 지붕의 사선, 출입문 등의 이미지를 간략한 선으로 표현하며 점들과 어울려 놓았지만, 김환기는 이미지를 점으로 환원하고 선은 격자(格子, grid)로만 남겼다. 각자 다른 도구를 사용했지만 선으로 추상화된 그림을 그리다가 점으로 응축시키고 그 응축된 단위를 수없이 축적해서 커다란 전체를 다시 구성하는 작업 방법은 공통적이다 (그림 2. 김환기의 '붉은 점화' 참조).

클레와 김환기는 활동한 시대도 문화권도 다르다. 그런데 옷깃 한번 스치지도 않은 이들의 점화에는 ‘미술적 인연’이 숨 쉬고 있다. 김환기의 점화와 클레의 점화를 같이 놓고 상대적 차이와 공통점을 관찰하는 해설을 내놓는다면, 클레를 알고 있는 많은 미술인들이 김환기도 친밀하게 이해할 것이다. ‘한국 고유’라는 국뽕과 청승의 진한 선을 지우고 훌륭한 작가들의 예술적 지향이 세계적으로 어떻게 만나고 엇갈리는가를 담론의 캔버스로 깔아 김환기의 점화를 묘사하자. 그래야 김환기의 점화가 세계인들에게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