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프랑스 국립사법관학교(ENM)에서 연수할 당시 교수로부터 한국에서 ‘법관 부동성(不動性, inamovibilité) 원칙’은 어떻게 규정되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법관 부동성 원칙’이라는 개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법관 부동성 원칙이란 본인의 동의 없이는 승진이나 전보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최고사법평의회와 함께 사법권 독립 보장을 위한 핵심적인 제도로 널리 정착되어 있다. 많은 국가에서 헌법에 이를 규정하고 있고 법률로 규정하는 입법례도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헌법에서 판사와 검사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사법관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프랑스는 판사에게만 부동성 원칙을 인정하고 이탈리아는 판사와 검사 모두에게 부동성 원칙을 인정한다.
최고사법평의회(Conséil superieur de la Magistrature)는 사법권 독립 보장을 위한 헌법기구로 프랑스가 1948년, 이탈리아는 1946년에 도입했다. 스페인, 스위스, 벨기에, 브라질 등 많은 국가에서도 제도화 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법원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던 불행한 역사를 반성하며 대법원장이 아닌 최고사법평의회가 판사의 인사와 징계를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랑스 최고사법평의회의 경우 법원위원회는 대법원장과 각 직급별 판사회의에서 선출된 대법관 1명, 고등법원장 1명, 지방법원장 1명, 판사 2명, 검사 1명, 국사원(Conseil d’Etat) 위원 1명, 변호사 1명, 대통령과 상원의장, 하원의장이 각 2명씩 임명한 6명 등 15명으로 구성된다. 사법권 행사와 관련해 침해를 받은 시민이 최고사법평의회에 제소할 수 있도록 하여 법관에 대해 엄격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법관의 독립과 책임 강화할 제도 개혁 필요
법관 부동성 원칙·사법평의회 도입 등 과제
최근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논란이다. 2017년 취임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 개혁방안의 일환으로 사법행정의 ‘민주성’과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도입했다. 법원장 임명에 소속 법원 판사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3인 내외의 복수 후보를 추천한다. 문제는 법적 근거다. 일각에서 “인기투표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헌법은 물론 법원조직법에도 관련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대법원규칙이나 대법원예규로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법원장 인사제도를 국회의 입법 과정 없이 대법원장 임의로 결정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프랑스는 헌법 제65조에서 고등법원장과 지방법원장 인사를 최고사법평의회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권은 어느 범위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부터 내려온 법관 인사제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큰 틀에서 변함이 없다. 법원조직법에 규정된 대법원장의 각급 법원 판사에 대한 보직 권한은 5공 군사정권 때도 시행되어 오던 것이다.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을 임명하지만 집권 여당이 국회 다수당을 차지할 경우 국회 동의 제도는 효과적인 견제장치로 기능하기 어렵다. 법관인사위원회도 심의기구라는 한계 때문에 자칫 정권과 코드에 맞는 대법원장이 임명될 경우 임기 동안 법관인사권을 이용해 얼마든지 전국 법원을 장악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헌법이나 법원조직법에 법관 부동성 원칙이 규정되어 있지 않고 대법원장에게 인사권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 이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우리의 법관인사제도는 독립성 보장에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사법부 독립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독립성 보장은 그에 합당한 능력과 책임이 조화를 이룰 때만 의미가 있다. 사법의 신뢰가 흔들리면 법치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 사법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법관인사제도 개혁이다. 헌법 개정사항이 아닌 한 법원조직법 개정을 통해 법관의 독립과 책임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개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관 부동성 원칙과 최고사법평의회의 도입, 법관직급제를 통한 승진심사와 근무평정 강화 등을 최우선 과제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종민 변호사(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