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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의 ‘법과 사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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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의 ‘법과 사람 사이’] ‘애런’은 정말 존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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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존경받는 대주교 살해범으로 체포된 19살 애런은 “시간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애런이 ‘시간을 잃은’, 그러니까 기억을 상실한 바로 그 순간 그는 대주교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다만 그때의 그는 애런이 아니라 로이다.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말더듬이, 자기의 감정 표현조차 서투른 애런이 아니라, 증오의 눈빛에 험한 욕설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로이. 정반대의 완벽히 다른 두 인격이 한 몸 안에 있었다. 애런은 1급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정신이상으로 판단되어 사형선고를 면하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애런의 변호인은 자신의 변론으로 이끌어낸 최상의 결과에 들떠 있다가 실은 애런이 완벽하게 로이를 ‘연기’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럼 로이는 없었던 거야?” 허탈한 표정의 변호사의 질문에 애런이 비웃음을 머금고 하는 말. “하하하. 처음부터 애런이 없었던 거죠.”

범죄영화의 고전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1998년작)’를 최근에 OTT로 다시 보면서 저 반전 대사의 진실에 근원적 의문이 들었다. 과연 애런은 ‘선천적 악인’ 로이가 연기한 허구일까. 애런은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도망쳤다가 구호시설에서 대주교를 만났다. 사회적으로 신망 받는 대주교는 은밀하게 그를 성적으로 학대했다. 아버지의 학대, 그리고 아버지를 자처한 또 다른 어른의 학대가 없었다고 전제한다 해도 애런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임대인을 살해한 스무 살 청년이 있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 30만 원짜리 원룸을 얻은 게 넉달 전이었다. 그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월세를 내지 못했다. 그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해 남들이 알아듣기 힘들었고,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간단한 계산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편의점, 식당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도 하루 이틀 만에 해고되었다. 임대인은 이제 더 이상 봐주기 어렵다며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했다. 갈 데가 없었다. 아버지가 있는 집에는 다시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나왔었다. 갈 데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인생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 부엌칼이 눈에 들어왔다. 임대인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출혈로 인한 쇼크로 숨졌다.

학대가 계속되고 사회가 눈 감은 사이
‘로이’는 점점 커지고 ‘애런’을 집어삼켜
문제는 ‘애런’을 죽게 만든 사회 시스템


아무런 전과가 없는 이의 중대 범죄에 당황한 수사기관은 그에 대한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지속적인 학대에 억눌렸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 살인의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지독한 가정폭력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견뎌내기만 한 그는 증오와 잠재적 폭력을 몸에서 지워내지 못하고 마음 한켠에 괴물을 키웠다. 집을 나온 그 넉 달 동안 운이 좋으면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다 된 걸 얻어먹었고, 길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피울 때 그나마 행복해하던 청년은 가끔 밥을 사주며 걱정해 주는 임대인이 싫었다.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인지, 일자리 구하는 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자꾸 묻는 아버지 나이뻘 임대인이 한순간, 그토록 죽이고 싶던 아버지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신 장애를 주장하지도 않았지만, 최후 진술에서 그 흔한 반성의 말이나 유족에 대한 미안함조차 표하지 않아 법정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물론 심한 학대를 당했다고 다 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보호막조차 없이 스무 해를 보낸 한 청년이 서서히 괴물로 변해가는 동안 학대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한 우리가 괴물에게 희생된 친절한 임대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애런은 원래 애런이었다. 만약 로이가 원래부터 존재했다면 둘은 공존했을 것이다. 학대가 계속되는 사이에, 학대를 눈치채고 조치를 취해야 할 공동체가 작동하지 않는 사이에, 대주교의 성적 학대 의혹 제기에 ‘설마’하며 사회가 눈을 감은 사이에, 애런은 시들어가고 로이는 점점 커지다 마침내 로이가 애런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애런이 소멸되고 로이가 비웃는 대상은 애런을 죽게 만든 사회 전체 시스템이다. 애런이 처음부터 없었던 건 절대 아니다.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