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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책임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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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이트어에는 얼음을 뜻하는 단어가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다도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찻잔을 모양, 빛깔, 질감에 따라 수십 개로 구별해서 부른다. 영어에는 짠맛을 표현하는 단어가 따로 없이 소금의 형용사형으로 'salty'라고만 하지만, 우리말에는 짜다, 짭짤하다, 짭조름하다, 찝찔하다, 건건하다 등 미묘한 단어가 풍부하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다양한 단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것을 구별할 수 있고 구별할 필요를 느낄 정도로 언중(言衆)의 인식이 섬세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법률가들이 법률용어에 대해 가지는 예민한 태도도 대부분 그런 섬세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비법률가들에게는 쓸데없는 집착이나 잘난 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용어를 섬세하게 정의하고 구별해서 씀으로써 법률관계를 명확히 기술하고 오해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암구호로 조직원을 식별하듯이 법률용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지를 기준으로 법률가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취소·해제를 혼동하거나 제척·기피·회피를 뒤섞어 쓴다면 법조계에서 사람 취급 못 받는다고 로스쿨 학생들한테 잔소리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책임’에 대한 사회 인식 섬세하지 못해
사전적 책무, 사후적 책임 구분 않고 혼용
잘못한 이에게 엄정한 책임 묻기 위해서는
용어를 섬세하게 정의하고 구별해서 써야


그러나 실제로는 법률가이든 비법률가이든 의식하지 못한 채 중의적으로 쓰는 단어가 많이 있는데, 그 예로 ‘책임’을 들 수 있다. 한편으로는 책무나 임무라는 의미로 책임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영어로 'responsibility'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에 대해 일정한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책임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손해배상책임, 형사책임 같은 말에서 책임이 이에 해당하는데 영어로 'liability'에 가깝다. 둘은 의미상 차이가 있으므로 전자의 경우에는 책무나 임무라는 단어를 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경찰관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책무가 있지만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해 민형사상 책임을 질 것인지는 그 밖의 요소들, 즉 고의·과실, 손해, 인과관계 등을 더 따져 봐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모호한 단어의 사용이 다툼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게 네 책임이지 누구 책임이란 말이냐”라고 질책하는 사람은 ‘책임’을 책무라는 뜻으로 얘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조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왜 책임부터 지라고 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은 ‘책임’을 잘못에 대한 불이익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편 가르기와 왜곡이 도를 넘은 우리 사회에서 단어의 모호성까지 겹치니 대화가 더 꼬이고,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마저 생긴다.

이것은 그만큼 ‘책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섬세하지 못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맛소금은 짭짤하고 오징어는 찝찔한데 영어권 사람들은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salty'라고만 하듯이 우리는 사전적 책무와 사후적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고 책임이란 단어로 퉁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자조일까? 냉정하게 책무를 정의하고 진짜로 잘못한 이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무작정 책임지라고 목소리만 높이기에 앞서 ‘책임’의 의미에 대해 우리 모두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천경훈 교수(서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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