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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논단] 법적 책임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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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논란과 정치적 공방. 세월호 참사 때도 경험했지만, 크나큰 희생의 후속편은 예상대로 펼쳐진다. 또다시 참변이 일어난 지금, 세월호 참사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대로라면 또 다른 대형 사고가 찾아오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대책’이 되풀이될 것이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에 따른 법적 책임도 당연히 따라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대규모의 희생이 발생하였기에 공적, 정치적 책임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개혁 없이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신속한 보고를 받고, ‘수습에 만전을 기하라. 가용인력과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라’는 식의 지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없다. 그러한 지시가 실제 현장에서의 차이를 낳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국정에서 사회안전을 적정(지금보다 더 높은) 순위에 두면서 실현 가능한 시스템을 정립하고 재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대형재난의 위험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방조치’와 신속하고 체계적인 ‘현장대응’이다. 이 모두 자율성, 적극성, 신속성, 현장중심성을 갖추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피라미드 조직의 관료제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갖추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자각할 때 가능성이 열린다.

수익 창출에 사활을 거는 기업에서는 직위에 상관없이, 때로는 직위 자체를 없애면서 자율적 의견 개진과 수평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조직문화를 만든다. 그것이 창의력을 제고하고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지름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상사의 지시만을 바라보고, 지시 받은 외의 일은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거나 전례 없는 변화를 꾀하면 ‘시킨 일이나 잘하라’고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대형재난의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은
신속하고 체계적인 ‘현장대응’으로
자율과 적극·신속·현장중심성 갖춰야


그러나 위험이나 재난 예방을 위해서는, 현장을 잘아는 실무자가 현실에 맞는 제안을 자율적으로 생산해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제안자에게도, 그것을 적절히 수용하는 상급자에게도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 급박한 현장에서 실행되기 어려운 매뉴얼을 잔뜩 만들고 나서, 대책을 세웠다고 홍보하는 책상머리 행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말 그대로 책상(bureau)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관료주의(bureaucracy)가 깨어져야 하는 것이다.

긴급한 상황에서 스피드를 내기 위해서는 해당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들의 사고가 지금보다 훨씬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어떤 조직이든 평상시의 경직성이 비상시의 순발력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긴급재난 신고를 받았든 재해현장을 발견하였든, 상황에 따라서는 위계를 뛰어넘는 보고와 대처를 할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서 장관이라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는 힘이 현장에 실려야 하고, 칸막이 없는 단일 지휘체계가 가동될 수 있는 조직 탄력성도 필요하다.

현장에서는 늘 인원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100만 명의 공무원이 있는데도 말이다. 윗사람 중심의 과도한 의전이나 관행적인 행사를 없애고, 불필요한 보고서 작성을 줄여, 현장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안전과 복지에 쓰일 귀한 돈과 시간, 사람을 허비하지 않는지 항시 점검하고 교정하지 않으면 원점으로 회귀하게 된다.

수많은 법령과 매뉴얼, 보고서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글자는 생각의 표지(標識)일 뿐 실재(實在)가 아니다. 이번 참사의 현장이 우리의 현실이고, 실제 운용되는 시스템이다. 사후 책임을 위주로 공방을 펼치는 법률가적 사고로는 사회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무거운 슬픔 속에서, 현 시스템의 한계를 차분하고도 끈질기게 개혁해 나가는 나라다운 나라를 그려본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위는 내가 보존해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교훈만 남게 될 터이다.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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