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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역도산과 김일, 그리고 김기수...헝그리스포츠의 영웅들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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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이라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1979년 10월 26일 저녁에 벌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 사건을 떠올리리라. 역사 인물 가운데 그날 사망한 또 다른 거물은 안중근 의사에 총격으로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1909년 하얼빈에서다. 그날 별세한 인물 가운데 프로 레슬러 김일도 있다. ‘박치기 왕’ 김일은 1970년대 프로레슬링 전성시대에 ‘국민 영웅’이었다. 거구의 상대 선수를 박치기 한 방으로 쓰러뜨려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스포츠 스타의 생애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김일의 행적을 취재하던 중 일본 프로레슬링의 신화적 인물 역도산, 그의 제자인 김일,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 이들 3인의 각별한 인연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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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추석날에 여수시민 씨름대회에서 김일, 김기수, 두 장사가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덩치가 크고 전문씨름꾼인 김일이 김기수 소년을 꺾고 황소 한 마리를 차지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1956년 10월에 김일은 레슬링을 배우려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불법 입국자 수용소에 갇혔는데 편지 겉봉 주소란에 ‘도쿄 역도산’이라고만 쓰고 ‘제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넜다’는 사연을 써 보냈다. 며칠 후 역도산의 비서실장이 수용소에 찾아와 김일이 어떤 인물인지 살폈다. 김일은 역도산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역도산의 문하생이 되었다.

본명이 김신락인 역도산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가 스모 선수로 활약하다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여 슈퍼 스타가 되었다. 그가 사각의 링에 올라 미국 레슬러를 ‘당수(唐手) 춉’으로 쓰러뜨리면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당한 패배의 울분을 역도산의 승리를 보며 해소했다. 역도산은 사업 수완도 좋아 1961년 도쿄에 지상 9층, 지하 1층의 대규모‘리키(力) 스포츠 팰리스’를 세웠다.

아마추어 전적이 88전 87승인 김기수에게 유일한 1패를 안겨준 복서는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1960년 로마올림픽 준준결승에서였다. 벤베누티는 금메달을 땄다. 김기수는 프로복싱으로 전향하여 일본에 시합을 하러 간 김에 김일을 찾아갔다.

김일은 역도산에게 김기수를 소개했고 역도산은 함경북도 고향 후배인 김기수를 각별히 배려했다. 자신의 체육시설을 무료로 쓰도록 하는 한편 세계적인 복싱 트레이너 딕 새들러를 일본에 초청하여 김기수를 가르치게 했다. 훗날 1966년 6월 25일 김기수는 장충체육관에서 프로 전적 65전 전승의 벤베누티를 꺾고 주니어미들급 왕좌에 오른다.

역도산은 1964년의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경기의 파이트머니 전액을 한국팀을 위해 성금으로 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63년 연말에 야쿠자의 칼을 맞고 별세해 도쿄올림픽을 보지 못했다. 김일은 은퇴 후 귀국하여 오랜 병고 끝에 타계했다.

지난 7월 7일 필자는 신한은행 창업자 이희건 회장의 차남 이경재 씨를 서울에서 만났다. 이희건 회장의 회고록 『여러분 덕택입니다』에 실린 사진을 보니 1960년 2월 3일 역도산이 10세 소년 경재 군과 나란히 앉은 장면이 있기에 당시 상황을 물어봤다.

“아버지를 따라 어느 민속행사장에서 역도산을 만났는데 무시무시한 레슬러답지 않게 아주 부드러운 인상이었고 저를 귀여워해주었습니다.”

김일과 역도산 도장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안토니오 이노키도 지난 10월 1일 별세했다. 프로레슬링은 한일 양국에서 퇴조했고 불세출의 레슬링, 복싱 영웅들은 사라졌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밭’이었던 레슬링, 복싱에서 한국선수들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이 부자나라가 되면서 ‘헝그리 스포츠’는 인기를 잃고 있는 것이다.


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