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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의 법문정답] '토착왜구' '김일성주의자'...우리의 표현의 자유는 어디에 와 있는가?

法問政答 : '법이 묻고 정치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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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구절은 신이 내려준다”고 폴 발레리가 말했는데 시만 그런 건 아닙니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모든 글의 첫 문장은 신이 내려줘야 합니다. 물론 시는 소설이나 산문과 다릅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단어·어미·조사·단락에서 더 보탤 것도 더 뺄 것도 없는 궁극의 글이니까요.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시는 신이 내려준다.”

누구나 궁극의 글을 꿈꾸지만, 시인은 다른 이들과 비길 바가 아닙니다. 서정주의 ‘시론’이라는 시에는 시인의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바다속에서 전복 따 파는 제주해녀도/제일 좋은 건 님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물속 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시의 전복도 제일 좋은 건 거기 두어라/다 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바다에 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 것을”

저는 예술가들의 글과 인터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낳은 독특함이 있으니까요. ‘온리 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넘버 원’을 추구하는 사람과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습니다. ‘넘버 원’을 꿈꾸는 사람은 ‘직’을 쫓지만 ‘온리 원’을 꿈꾸는 사람은 ‘업’을 추구합니다. ‘직’을 쫓는 사람은 학벌이나 이력을 자랑하지만 ‘업’을 추구하는 사람은 작품으로 ‘거장’을 꿈꿉니다. 세상에는 작품 이력이 긴 사람과 직의 이력이 긴 사람이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최고의 작품을 꿈꾸는 예술가는 나이 팔십에도 “나는 언젠가는 거장이 될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도 그런 분입니다. 그의 딸 박승숙이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에서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아버지가 갑자기 잘 팔리는 화가로 둔갑해 있었다”고 썼을 정도로 그는 팔십이 넘어서야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는 201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단색화’가 주목받으면서 세계적 작가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공부하고, 단색화 운동을 해서 세계화를 시켜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림이 안 팔려도 ‘반드시 내 시대가 온다. 지금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고 확신하면서 죽자사자 그렸어. 결국 팔순을 넘어 세계 미술계에서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됐지”


서구 근대는 300년 유산
우리 근대는 고작 100년
사상·표현의 자유 아직 체화 안돼


서구 근대 300년이 남긴 예술 유산은 어마어마합니다. 일본 근대 200년이 남긴 유산도 (서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꽤 됩니다. 우리 근대는 고작 100년입니다. 식민과 전쟁, 가난과 독재중에도 우리의 예술가들은 눈물겹게 분투했지만, 유산은 초라합니다. 그나마도 친일, 친북, 독재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다 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습니다.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토착왜구”, “김일성주의자”, “극단적 친일” 같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작품이나 말이 검열의 대상이고 징계의 대상입니다. ‘사상의 자유’·‘표현의 자유’는 헌법 조문에만 있지 아직 체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예술은 항상 용기 있게 도전했습니다.

1968년 김수영과 이어령은 불온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른바 ‘참여’·‘순수’ 논쟁이죠. 그 논쟁에서 김수영은 “서랍 속 불온한 작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현대 사회며, 그런 영광된 사회가 머지않아 올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서랍 속 불온한 작품’을 끝내 꺼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후에 발표된 그 작품의 제목은 ‘김일성 만세’였습니다.

“‘김일성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수영이 이 시를 쓴 1960년 10월 6일로부터 우리의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왔을까요.


박성민 대표 (정치컨설팅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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