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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신(新)과 함께] 형사재판도 이제 ‘혁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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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조금 복잡한 민사재판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법률적 쟁점이 복잡한 것은 아니었는데, 변제기가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채권을 두고 양 당사자가 서로 상계를 주장하는 등 청구 금액의 정확한 계산이 상당히 어려운 사건이었다. 이에 양측 대리인 모두 “상계하겠다”고 주장만 하고 막상 그 결과인 계산값은 내놓지 않고 있었다. 재판장도 번거롭다고 생각했는지 “이거 계산이 영 복잡할 것 같으니 그냥 적당히 계산해서 조정하시죠”라며 조정을 권했다. 양측 대리인 모두 반색하며 조정에 동의했다.

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 변호사들이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민사재판에서는 종종 이처럼 수학 문제 풀 듯 복잡한 계산이 등장하여 변호사들을 힘들게 하는데, 결국 조정이 되지 않아 판결을 선고받게 되면 판결문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수식들을 보며 재판부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곤 한다. 재판이 끝났다고 계산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소송비용 확정 과정에서는 각자가 부담한 이런저런 비용을 철저하게 10원 단위까지 따져가며 나눈다. 법의 세계는 참으로 계산이 철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한 계산법은 형사법정으로 오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벌금은 10만 원 단위부터 시작이고 징역은 1개월 단위부터 시작이다. 조금 큰 사건이다 싶으면 징역은 6개월 또는 1년으로 단위가 커진다. 단위만 커지는 것이 아니다. 양형기준을 바탕으로 나름의 계산법이 동원되지만, 민사 판결문에 비하면 ‘계산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대략적인 범위만 계산한 뒤 그 안에서 선고형을 정하는 것은 법관의 폭넓은 재량에 맡겨져 있다.

이를테면 “A, B가 공범인데 A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니 A는 징역 3년, B는 징역 2년”, “피고인이 1심에서 징역 2년 선고받고 2심에 와서 피해자와 합의했으니 2심에서는 1년으로 감형”이라는 식이다. 법조인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판결이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어딘지 이상하다. 누군가의 자유를 박탈하는 중차대한 결정인데 지나치게 성기다.

 

철저한 법의 계산법, 형사법정엔 사라져
자유 박탈하는 결정인데 지나치게 성겨
국민 인권 위해 양형기준 정밀화 필요


다시 민사재판과 비교해 보면 명확해진다. 민사재판에서 천 원, 만 원을 더 받고 덜 받는 문제는 사실 당사자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굳이 계산을 정확히 하기 위해 변론이 수차례 속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징역을 하루 더 받고 덜 받는 문제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차이인데 형사재판에서는 적당히 6개월 단위로, 1년 단위로 성기게 정하면서 그 산정 근거마저 지나치게 모호하게 설명한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국민의 자유를 소중히 하는 진정한 인권국가라면 징역을 하루 단위로 계산하여, “징역 786일” 같은 식으로 선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대체 무슨 근거로 그와 같은 형이 선고되었는지 정밀한 산출내역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형벌을 정함에 있어서는 수많은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를 전부 수치화하여 산술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라 하여 지레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양형의 기준을 보다 정밀화하는 것은 국민의 인권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2009년부터 시행된 양형기준은 대한민국의 형사재판을 한걸음 진일보시켰다. 그러나 개인의 재산과 자유, 심지어 생명까지도 제한할 수 있는 형벌의 기준으로서 양형기준은 여전히 모호하고 성기다. 적극적으로 개선하여 ‘혁신’에 가까운 변모가 필요한 때이다.

빅데이터와 AI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그간 한계로 느껴졌던 여러 일들이 발전된 기술의 도움으로 하나씩 해소되어 가고 있는 시기다. 우리의 형사재판을 혁신하는 일도 기술 발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류인규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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