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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서면 블라인드 테이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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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는 파리스(Paris)의 심판 이야기가 나온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세 여신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판단하는 역할을 파리스가 맡았는데,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미스 유니버스 진(眞)으로 뽑는 바람에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와인 애호가들에게 파리스(Paris)의 심판이라고 하면 트로이 전쟁 보다는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 간의 대결 이야기가 먼저 떠오른다. 1976년에 파리에서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을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여 우열을 가리는 시합이 열렸다. 말이 시합이지 사실 결론은 시합도 하기 전에 이미 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와인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당시 미국은 와인 생산 역사도 미천한 애송이에 불과한 데다가, 평론가 11인 중 9인이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산 와인이 1등을 차지한 것이다(레드 1등은 Stag’s Leap Wine Cellars였고, 화이트 1등은 Ch. Montelena였다). 그렇다고 프랑스쪽에서 그저 그런 와인이 출전한 것도 아니었다. 무똥로칠드, 오브리옹 등 보르도 최고급 레드와인과 뫼르쏘, 몽라쉐 등 부르고뉴 최고급 화이트와인을 내보냈다. 심사위원들은 모두 뒷목을 부여잡았고, 당시 현장에 참석했던 타임지 기자는 이 충격적인 결과를 “파리의 심판”이라는 헤드라인을 걸고 기사화했다.

이 에피소드는, 어떤 제품에 대한 평가를 함에 있어서 이미지와 브랜드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눈을 가린 채 마셔보면 프랑스의 특급 와인보다 신대륙의 무명 와인이 더 좋을 수도 있는 것인데, 라벨을 보여주고 마시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랑스 특급 와인이 더 맛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현상이 법조계에는 없을까? 의뢰인들도 브랜드를 보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변호사의 진짜 실력을 의뢰인들이 알기는 어려우니 로펌 간판이나 변호사의 경력을 보고 선택하는 것은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이지만 법원도 준비서면을 제출한 로펌의 브랜드를 보고 다소간의 선입견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어쩔 때는 양쪽 서면의 로펌 이름을 가리고 서면을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일종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 법원과 판사들을 신뢰한다. 준비서면에 대한 블라인드 테이스팅 따위는 필요 없으신 분들이라고.


김상훈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트리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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