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차병직 편집인 칼럼

[차병직 편집인 칼럼] 노동의 이해

 

2022_chacha.jpg

 

 

노동은 고귀하다는 표현이 경구처럼 떠도는 것은 노동을 천하게 여긴다는 증거일 수 있다. 고대 서양에서는 육체 노동이 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노예 같은 하층 계급이 필요했다. 보통의 시민이 활동을 통해 사례를 받았다면, 노예는 노동으로 임금을 얻는 시대였다.

노동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사상이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으리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육체적 노동은 인간을 고상하게 만든다”는 유대교의 금언은 도덕적 의미를 탄생시켰다. 노동은 생계 유지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게으름은 바로 죄악이나 다름없다는 관념을 주입시켰다. 그러나 노동은 여전히 정신적 활동에 비해 낮게 평가되었다.

근대의 문턱에서 노동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인간의 모든 이론은 결국 활동이나 노동으로 종결된다는 생각에 이어, 노동이 가해져야 새로운 가치가 창조된다는 논리에서 소유 개념이 생겼다. 모든 사물은 노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사고에서 노동의 개념은 추상화되고 독립성을 획득했다. 자유 계약을 통해 노동을 신분에서 해방시키면서, 누구나 노동을 할 수 있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노동은 경제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았고, 자유로운 노사관계만 존재하는 이상적 사회를 전제하면 경쟁에 의해 노동자의 품위는 저절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 활동이라는 관념은 육체 노동에 정신 노동까지 끌어들였지만, 결국 저임금이 노동자를 상징했다.

노동을 부리는 자본은 축적되고, 노동자는 빈곤에 빠졌다. 가련한 노동자는 “적게 먹고, 많이 뛴다”는 풍자가 적절해 보였다. 정부를 향하여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요구가 생겼다. 사회주의적 노동 개념도 형성되었다. 노동력 판매자로서 노동자의 비극이 소외임을 밝히고, 노동자를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선언했다.

노동조합법 개정안으로
국회 상정된 ‘노란봉투법’
입법 운동으로 보느냐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보느냐
끊이지 않는 노동과 현실의 갈등


노동자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다. 노동법을 사회법으로 분류하는 연원이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노동과 임금을 교환하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계약관계로 나아갔다. 노동 문제는 독자성을 잃고 수많은 사회 문제 중의 하나로 스며드는 듯한 변화도 감지되었다. 노동자를 사회적 보호의 대상이 아닌 독립한 계약 당사자로 승격시키는 듯한 베일에 가린 실상은 가진 자가 힘을 발휘하는 냉혹한 경쟁 세계였다.

역사성에서 비롯하는 본질이 오늘의 현상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인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법을 사회법으로 이해하느냐 계약법 체계의 일부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노동자의 실상은 달라진다. 고성과 폭력이 등장하는 쟁의 현장을 위법으로만 평가하느냐 불가피한 사정을 고려하여 예외를 넓게 인정하느냐의 차이와 비슷하다. 금년 봄부터 시작한 화물연대 파업이 6개월 만에 합의에 이른 결과를 노사 어느 쪽의 승리로 보느냐가 입장에 따라 다르다. 노동조합법 개정안으로 상정된 노란봉투법을 노동자의 단체행동으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의 범위를 좁히려는 입법 운동으로 보느냐 불법을 조장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보느냐의 간극이다.

노동자와 현실의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그럴듯한 사상은 노동을 말로나마 신성시하는 가운데, 강력한 자본은 노동을 상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자유는 부유한 자들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불만에 찬 노동자의 반항이 사회를 향하지 못하게 막으면, 궁극에 그 분노는 노동자들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체 없는 것이 만들어 내는 사회의 그림자와 같다. 참다가 한꺼번에 폭발하면 어떻게 되는가는 지난 역사의 장면들을 넘겨보면 확인이 가능하다. 예외가 일반적 원칙으로 바뀔 때 열리는 새 공간은 숨통을 틔우는 광장일까, 혼란과 불신의 골짜기일까? 노동의 총체적 미래 과제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관련 법조인

한 주간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