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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창

[미술의 창] 천재 피카소의 모방과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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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마티스와 피카소는 서로 확연하게 다른 과정을 밟았다. 마티스가 뒤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한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었다면, 피카소는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다. 또 대단히 많이 그렸다. 마티스가 총 1008점의 그림을 남긴 것에 비해, 피카소는 조각, 도자기, 판화 등을 제외하고도 그림만 1만3500점을 남겼다.

피카소가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은 자신이 접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여동생이 자수를 놓는 모습, 가족이나 친구들의 초상화, 동네 거지의 모습, 자신의 초상화, 종교적인 소재 등이었다. 우리가 지금 핸드폰으로 일상의 다양한 순간들을 찍듯이 피카소는 그림으로 그 순간을 기록하였다. 제2의 습관같이 그림을 그렸다.

사실적인 그림, 파리 생활하며 크게 변모
다양한 작품을 보고 모방하는 훈련 통해
대가들 그림의 특색, 자신의 내부에 흡수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창조의 자양분으로


파리 생활을 거치면서 피카소는 크게 변모했다. 당시 파리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려는 열정에 찬 젊은 화가들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는 미술의 메카였다. 이전에 피카소는 스페인 화가들이 최고라는 국수주의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푸생 니콜라, 앵그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들라크루와 외젠, 마네, 고갱, 세잔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루브르 박물관의 그리스 로마관이나 이집트관 등에 있는 고전 공예품, 이베리안 조각들로부터도 큰 감명을 받았다.

피카소는 이러한 다양한 작품들을 모방하는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피카소의 모방은 단순 모방이 아니었다. 여러 작품들의 특징과 매력을 섞어 새롭게 내놓았다. 예를 들어 “말을 끄는 소년(1906)”은 엘 그레코의 “성 마틴과 거지(1597-99)”의 구성을 그대로 베끼면서, 퓌비 드 샤반 피에르의 프레스코 벽화 같은 표면을 만들었고, 소년의 모습은 기원전 6세기경 젊은 남성의 대리석 조각에서 본떴다. 적어도 세 가지 작품을 혼합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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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 ‘Tu Marcellus Eris’, 1812년경, 유화

 

“부채를 든 여인(1905)”은 앵그르와 벨라스케스를 합쳐 놓았다. 앵그르는 “Tu Marcellus Eris(1819)”에서 인물을 대리석 조각같이 그렸다. 그림 안에 아우구수투스가 마치 사제(司祭)처럼손을 들면서 순간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다. 벨라스케스는 공작 부인을 모델로 한 “부채를 든 여인(1638-39)”을 그렸다. 피카소는 몽마르트 길거리에서 만난 비쩍 마른 소녀, 줄리에트를 그리면서 벨라스케스와 앵그르의 화법을 합쳐 변모시켰다. 모델 줄리에트가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다른 손은 근엄한 사제처럼 손을 올려 대리석 조각같이 보인다. 피카소는 제목도 “부채를 든 여인”으로 벨라스케스와 똑같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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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벨라스케스, ‘부채를 든 여인(Woman with a Fan)’, 1638-39년, 유화
(오른쪽) 피카소, 부‘ 채를 든 여인 (Lady with a Fan)’, 1905년, 유화


 

피카소는 “수준 떨어지는 미술가는 빌려온다. 위대한 미술가는 훔친다(The bad artists borrow. The great artists steal.)”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위대한 미술가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모방에서 시작했지만, 뻔한 아류적 모방이 아니라 훔쳐 놓듯이 재구성을 했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모방 훈련을 통해 대가들 그림의 특색을 자신의 내부에 흡수해 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데이터 저장이 아니라 그의 마음과 손에 익혀진 체험적 저장이었고 창조의 자양분이었다.

모방과 창조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모방 없이는 창조가 없다. 모방의 흔적과 모방의 변형을 함께 볼 때 미술품의 창조성을 즐겁게, 더욱 깊이있게 감상할 수 있다.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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