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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조각가 문신…노예처럼 작업하고 신처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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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39세 한국인 화가가 프랑스 파리에 단돈 50달러를 지니고 도착했다. 지인의 집을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 그 부근에서 닷새나 노숙을 했다. 배가 너무 고파 센 강에 빠져 죽을 마음도 품었다. 그러다 이응노, 김흥수 화백을 만나 이들의 소개로 부유한 조각가의 고성(古城) 저택을 수리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석공, 목수 일을 맡았다.

험한 중노동을 하면서 화가는 오히려 새로운 인생 변곡점을 맞는다. 딱딱한 돌덩이가 어느 순간 아기 살갗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면서 조각품을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긴 것이다. 망치와 끌을 잡고 돌을 쫄 때 나오는 경쾌한 소리는 시원(始原)의 음향처럼 들렸다. 고성 주인도 화가의 실력을 간파하고 ‘미술아카데미 뒤페’의 데생 교수직을 주선해주었다. 훗날 이 화가는 세계적인 조각가로 우뚝 선다. 문신(1922~1995) 화백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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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청년 시절에 ‘재불 화가 문신 작품전’이란 신문 기사를 보고 전시회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흑단, 브론즈로 만든 조각 작품이 주로 전시되었는데 문신 선생이 보이기에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악수를 할 때 오랜 조형 작업으로 다져진 선생의 탄탄한 손아귀 힘을 느꼈다. 마침 관람객이 적은 때라 선생도 무료했던지 초면의 청년과 꽤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은 신산(辛酸)한 삶의 역정을 털어놓았다. 동반한 프랑스 여성도 소개시켜 주었다. 선생은 인사치레겠지만 “파리에 한번 놀러 오시오!”라 말했다. 자리를 뜨는 청년에게 지인이 준 큼직한 케이크를 건네주었다. 그날 저녁에 그 ‘럭셔리’한 케이크를 하숙집 동료 학생들과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세월이 흘러 1991년 무렵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하는 필자는 문신 화백의 부인 최성숙 여사를 만났다. 그때 문 화백은 유럽 순회 전시회를 가졌는데 부인이 특파원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해 전시작품을 설명했다. 문 화백은 이미 서울올림픽 조각공원에 25m 높이의 대형 스테인리스 스틸 조형물인 ‘올림픽 1988’을 설치하여 거장 반열에 올라서 있었다. 1992년엔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문신, 헨리 무어, 알렉산더 칼더 세계 3대 거장 초대전이 열리기도 했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같이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그의 좌우명이다. 조각가의 작업엔 엄청난 육체노동이 필요하다. 딱딱한 흑단 나무를 전기톱으로 자르고, 끌로 파고, 그라인더로 다듬어야 한다. 금속 조형물을 만들 때는 철공소 장인 노릇을 해야 한다. 선생은 청년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 구두닦이, 목수, 염색공장 종업원, 영화 단역배우, 우편배달부 등으로 닥치는 대로 일하며 학자금을 마련한 후 일본예술대학에 입학했다. 이런 밑바닥 경험 때문에 서민과 더불어 산다는 좌우명을 세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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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9월 1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문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문신(文信): 우주를 향하여’라는 전시회가 열린다. ‘신처럼 창조한다’라는 좌우명처럼 우주를 향하는 기개(氣槪)를 풍기는 조형작품이 즐비하다. “인간의 손으로 어떻게 저런 웅대한 조형물을 만들 수 있나!”하고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걸작 앞에서 관람객은 위대한 예술가의 창의성과 노고에 경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 회화, 드로잉, 판화, 도자기 등 모두 230여 작품이 전시됐다.

선생의 대중적 인지도가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 대가에 비해 덜 높아서인지 전시장은 그리 붐비지 않는다. 덕수궁 안팎 산책을 겸하여 문신 예술을 감상하면 오래 추억에 남는 가을이 되리라.


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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