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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3)

3부 채색(彩色) ⑬오대양의 파도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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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위명지지(萬代威名之地)’에 세운 대전 검찰청사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1991. 4. 18. - 1992. 7. 28.)


 

내가 공직 회고록을 쓰면서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의 이야기는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써 두었던 「오대양 진혼곡」이란 글에 그 편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업무 일지를 살펴보다가 마음이 달라졌다. 우리 검찰사의 어떤 기록에도 없고, 오직 내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내용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이 글을 쓴다.

1991년 4월 18일자 인사 발령으로 나는 대검찰청 강력부장으로부터 제33대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전보되었다. 나의 전임 검사장은 임상현(任尙鉉) 씨로서 고등고시 16회 출신으로 나의 법과대학 동기생이다. 그는 같은 날짜에 대검찰청 총무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인사 당시의 검찰총장은 정구영,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서정신 씨였다. 검찰총장은 임기제 두 번째 검찰총장으로 5개월간 재직하였던 때이고, 같은 날짜의 인사 발령으로 서정신 대검 차장검사는 서울고검장으로 전보되었고, 법무부 차관이었던 김두희 씨가 그의 후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취임하였다.

나는 인사에 관하여 상사에게 미리 부탁한 적이 꼭 세 번 있었다고 서울지검 평검사 시절을 회상하며 썼다. 검사장급 인사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검찰총장에게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중이니 나의 희망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위와 같은 인사가 발표되기 직전, 정구영 검찰총장이 찾길래 그 방에 들어갔더니 나를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에 내정하였다면서 그간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고생했다는 치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 인사를 주관한 당시의 법무부 장관은 내가 서울지검 검사로 근무할 당시 나를 ‘여사머사 부장’이라고 부르시던 이종남 씨였다.

강력부장 시절을 돌이켜 보니 만 2년이 넘도록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지낸 세월이었다. 먹구름이 몰려드는 전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달리면서 칼과 창을 휘두르며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전장의 장수 노릇을 한 세월이었다.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던 그런 시절이라 해도 될 것이다.

나의 먼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던 옛날 땅, 충청남도의 검찰 책임자로 내려가는 내 마음은 밝았다. 검찰총장은 물론, 이번 인사의 주재자인 이종남 법무부 장관 두 분 모두 내가 오래전부터 충남 논산의 국유림을 대부받아 그 산에 밤나무를 심어 기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사정도 고려하여 나를 대전으로 보낸 것이라 추정된다.

4월 18일 오전 11시, 대전지방검찰청 대회의실에서 나의 취임식이 열렸다. 이 취임식장에서 내가 전 직원에게 말한 취임사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 날짜 검찰 업무 일지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니, 일곱 줄의 메모로 적혀 있을 뿐이다. 전임 검사장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뜻, 내가 바라는 세 가지 꿈, 그리고 전 직원의 동참과 협조를 바라는 내용 등 세 가지 항목이다.

내가 바라는 꿈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충절과 예의의 고장’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항상 염두에 둔 검찰권의 행사.
2)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업무 처리.
3) ‘복생어청검(福生於淸儉), 명생어화창(命生於和暢)’의 뜻에 맞는 공사(公私) 생활.

한 지방의 검찰 책임자가 되면 검찰청 주관으로 각종 행사를 치러야 하고, 지역 유관기관과의 공동 행사에 기관장 자격으로 참여해야 하는 일이 예상외로 많아서 이 행사에 참석하려면 식사, 축사, 치사, 기념사 또는 격려사 등의 명목으로 연설해야 할 일도 많다. 산하기관인 지청을 순시하는 경우는 물론, 지청장이 참석하는 검찰 간부회의에서도 훈시 또는 지시 사항으로 검사장으로서 말해야 할 경우가 예상보다 상당히 많다. 지방검찰청이나 대검찰청에서 치러지는 각종 행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이란 직위는 명실상부한 검찰기관의 장이므로 이런 각종 행사에서 연설해야 하는 자리이다.

내가 오랜 검사 생활을 이어 오면서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이런 연설용 원고를 작성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검사장의 직급에 이르러서도 이런 일을 하면서 지내왔다.

 

상사의 연설 문안을 작성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왜 그 연설문을 내가 대신 작성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상사가 꼭 해야 할 말의 내용을 적당한 방법으로 알려 드리면 될 일인데, 상사가 읽을 내용 전문을 글로 작성해야 하니 정말 번거로운 일이었다. 나 혼자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명실상부한 검찰의 기관장이 되었으므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부하 검사에게 이런 번거로운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의 이런 결심은 내가 공직을 마칠 때까지 이어져 연설문은 모두 스스로 작성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취임사, 대검찰청 차장검사의 퇴임사, 법제처장의 취임사와 퇴임사. 이런 것은 도두 내가 직접 작성한 것들이다. 그 이외의 훈시, 지시, 치사, 격려사 등 여러 행사에서 치러진 나의 연설문은 모두 작은 메모지에 몇 줄씩 기재하였다가 그 제목만 훑어보면서 말을 이어 갔던 것이다.

말이란 남에게 전달하는 의사소통 수단이므로 문장이 길어선 안 된다. 짤막짤막하게 끊어야 남들이 알아듣기 쉽고, 또 설득력도 있다. 검사들은 임관되자마자 공소장과 불기소장을 작성하는데, 그 문서는 몇 장이 되는 내용이라도 오직 한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판사의 판결문도 이와 같다. 우리나라의 헌법(憲法) 전문(前文)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긴 한 개의 문장 작성에 익숙한 법조인들이 쓰는 글의 내용이 아무리 명문이라 하더라도 읽는 사람에게 크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연설에 가장 적합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직업군이 바로 언론인들이다. 글의 제목을 가장 그럴듯하게 뽑아내는 재주꾼 역시 그들이다. 같은 언론인 중에서도 긴 글을 쓰는 취재기자보다 짧은 문장을 잘 구사하는 편집기자가 더 큰 대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의 청 내 행사는 물론, 지역 행사에서 내가 한 말은 문장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내가 미리 작은 메모지에 적어 연단에서 보았던 그 메모지는 업무 일지에 전부 남아 있다. 다시 옮겨 쓴 것이 아니라 그 메모지에 풀칠하여 수첩에 붙여 놓았다. 업무 일지 여기저기에 수십 개의 메모지가 붙어서 너덜거린다. 이런 사유로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취임사도 오직 일곱 줄의 글로만 나의 수첩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퇴임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의 업무 일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직책의 업무 일지와 별다를 것 없이 많은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물론 검사장으로서의 통상적인 업무 처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부임 몇 개월 뒤에 일어난 속칭 오대양 사건은 사이비란 비난을 받던 종교집단의 많은 신도가 관련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서 만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으므로 이 사건의 처리 전반에 관한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그때 발생된 후 다음 해 1월 하순에 일심의 선고가 이루어진 사건이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대전지검의 전 검찰력이 이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에 관한 처음과 끝의 모든 경과를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다. 2008년에 우리 검찰 스스로가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검찰이 수사 처리한 20대 사건의 하나로 선정하여 이미 검찰의 정사(正史)에 그 내용을 자세히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발생 후 수사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점에 관하여 수사 낙수 형태의 글로 적어 두었던 글이 있다. 「오대양진혼곡」이란 제목의 글인데, 이 글은 이미 오래전에 『검찰동우』 지에 전문이 게재되었고(통권 제27호), 작년에 발간된 나의 문집 『밤나무 검사의 글 자취』에도 ‘심심풀이’란 두 개의 글 중 하나로 실어 놓았음을 참고로 적어 둔다.

나의 업무 일지를 살펴보다가 희미했던 내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하나가 있어서 여기에 덧붙이려 한다.

 

이 사건의 재판은 그다음 해 2월 초까지는 반드시 판결이 선고되어야 하는 사건이었다. 이듬해 1월 18일 이 사건의 결심 공판이 열려 1월 30일에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1월 10일의 공판 내용을 살펴보니, 이날의 재판은 오전에 개정되었으나 밤늦게까지도 끝내지 못하고 하루를 넘겨 그다음 날인 1월 11일 아침 7시에야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법원의 재판 역사상 이런 전례가 있었다는 말은 그때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재판이 진행되다가 구속 기간 만료를 코앞에 두고 1심 판결이 선고된 사건이 이 오대양 사건이다.

이 사건 이외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처리한 일이 하나 더 있다. 즉 대전고 지검 종합청사의 건립 추진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의 개정으로 1992년 9월 1일에 대전고등검찰청이 새로 발족하게 되었으므로 그 사무실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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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도 대전지검 구청사   <사진=박현철 대검찰청 대변인 제공>

 

1991년 당시에도 대전지방검찰청 자체 건물이 비좁아 건물 4층에 조립식으로 건물을 증축하여 특별수사부가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 임시 건물 역시 수용 한계를 넘어서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야 할 처지였다. 이 건물은 대전시 중구 선화동 188번지 세워진 건물로서 1972년 12월 26일에 준공되었다. 이 건물이 당시의 대전지방검찰청 청사이다.

대전지방검찰청이라는 명칭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30년 7월 1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이 대전지방법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에는 법원에 검사국이라는 명칭의 부서가 있어서 이 부서가 검찰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검사국이 법원에서 독립하여 검찰청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미군정 시절인 1945년 1월 1일부터 사법부 소관 각 기관의 명칭과 직명이 변경됨에 따라 검찰이 법원에서 독립하여 검찰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이 대전지방검찰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된 청사는 없었고, 위 검찰 청사가 건립될 1972년 말까지는 약 30년간 대전지방법원의 청사를 함께 사용하다가 1978년에 비로소 자체 건물을 마련한 것이었다. 당시 나의 직책은 서울지방검찰청의 평검사였다.

 

이 검찰 청사가 준공될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 규모는 대지 12,800㎡(3,896평), 연면적은 4,088㎡(1,291평),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립된 건물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자세한 내용을 내가 여기에 옮겨 적을 수 있는 것은 내게 정확한 사료(史料)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임 중에 완성된 『대전지방검찰사』(1992년)이다.

내가 대전지검장으로 부임하여 보니, 전임 검사장께서 『대전지방검찰사』를 발간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으나 이 일을 매듭짓지 못한 채 대검찰청 총무부장직으로 전보됐다. 나는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재직 시에 이미 법무 검찰의 모든 역사를 담아낸 『법무부사』를 발간한 바 있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나의 재임 중에 반드시 대전지방검찰청의 역사를 정리한 책자의 발간을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그 일에 박차를 가할 무렵 오대양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에 전 검찰력을 집중하면서도 나는 이 『대전지방검찰사』의 편집과 발간에 매달려 내가 중앙수사부장으로 전보되기 전에 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내 이름으로 의미 있는 발간사를 써서 책 서두에도 실어 놓고, 책을 발간하여 필요한 곳에 모두 배포했다.

내가 만 80세의 나이를 넘긴 오늘에 이르러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라는 두 글자에 대한 변함없는 나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38억 년이나 된다는 지구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또한 그들만의 인간 역사를 만들며 오늘에 이르렀다. 문명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행동 양식과 사고의 영역은 어떤 틀 속에 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역사이다.

 

두 개의 눈, 귀, 팔다리, 한 개의 코와 입, 이런 사람의 모습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런 역사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되새기며 다시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노안을 밝히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검찰청 건물로 들어서 보자.

 

전임 검사장 시절에 본관 건물 앞마당에 별관 건물의 증축 계획을 수립하였던 터이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이 건물을 좀 더 넓혀 특별수사부와 사무국 일부를 모두 그 건물로 옮기고 본관 4층에 증축되었던 건물을 대전고등검찰청의 임시 사무실로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앞마당의 별관 건축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1991년 11월 21일 대전지방검찰청 별관이란 명칭의 건물을 준공하여 필요한 부서를 모두 이전시켰다.

대전고등검찰청이 1992년 9월 1일 개청 예정이었으므로 그 얼마 전부터 기존 대전지검의 청사에 입주를 준비하다가 고등검찰청의 개청 시에 지검 청사의 본관 4층이 고등검찰청의 임시 사무실이 되었을 것이다. 이때 나는 이미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직을 떠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1개월간 재직하고 있었다.

둔산 지역에 새로 건축된 현재의 대전고등검찰청과 지방검찰청의 청사는 1995년 12월 30일에 착공하여 1998년 11월 11일에 준공되었으므로 만 2년 10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된 건물이다.

 

91년 당시 대전지검 청사는 협소한 3층
4층에 조립식 건물 증축 특별수사부 사용
이 건물마저 수용 한계 넘어 절박한 처지
대전고검 발족 계기로 새 건물 신축 추진
대전지법 등 적극 지지로 둔산 부지 확정

부지 절반 나눠 동쪽은 법원, 서쪽은 검찰
95년 12월30일 착공 98년 11월11일 완공
10층 본관 건물에 다섯 개의 부속건물로
정부 대전청사 한가운데 우뚝 자리 잡아
스카이 뷰로 보면 ‘만대위명지지’ 터 실감
 


내가 최초의 『대전지방검찰사』를 발간한 후 27년이 지난 후인 2019년에 제64대 대전지방검찰청 조상철(趙商喆) 검사장이 두 번째로 『대전지방검찰사』(2019)를 발간하여 내게 한 권을 보내왔다.

 

그 책을 보니 대전시 서구 둔산동 1390번지에 들어선 검찰 청사는 지하 2층 지상 10층의 청사 본관만 하더라도 32,157㎡이고, 구치감, 후생관, 구직원숙소, 신직원숙소 및 직장어린이집 등 다섯 개의 부속건물을 합한 연면적이 33,779㎡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 기간이 그러하였을 뿐, 건물이 들어선 부지의 선정과 건립 계획은 나의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직 시에 확정된 것이다. 법무부 검찰국과의 협의를 계속 진행하면서 추진된 계획인데, 검찰의 만년지대계(萬年之大計)이므로 소홀히 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이런 일이 검찰만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수는 없었으므로 법원과는 물론, 행정당국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다. 당시의 대전지방법원 원장은 이재화(李在華) 씨였다. 이 훌륭한 법조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분께서는 고등고시 14회 합격자로 나의 서울법대 5년 선배였다. 나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 항상 인자한 모습의 밝은 표정으로 대해 주시던 분이다. 법원과 검찰청 청사의 부지 선정을 내게 전적으로 위임하다시피 하면서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 주셨다. 법원장님의 전권 위임(?)에 따라 나는 대전광역시와의 협조를 이어 가며 현재의 대전 고·지검청사 부지를 확정했다.

 

지금 인터넷을 검색하여 스카이뷰로 법원 검찰 종합청사 전경을 내려다보니 이는 옛날 청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히 만대위명지지(萬代威名之地)에 건립된 웅장한 건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내가 근무했던 옛날의 대전지방검찰청과 그 옆의 대전지방법원 청사는 두 건물 모두 신좌인향(申坐寅向)이므로 방위가 동북동향으로 된 건물들이다. 양택풍수(陽宅風水)에서 쓰는 용어로 말하면 서사택(西四宅)에 해당한다. 그 청사 부지 앞의 대로인 보문로가 동서로 반듯하게 뚫리지 못하고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뚫린 길이였기 때문에 건물이 이런 모양으로 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입문은 검찰청 건물에서 보면 축문(丑門)이고, 법원에서 보면 인문(寅門)이다. 두 건물 모두 양택풍수의 근본 이론에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최고의 입지와 좌향이라고는 할 수 없는 땅에 세워진 건물이었다.

나는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대전시에서 둔산 지역에 들어설 신도시를 구상하면서 세워 둔 도시계획 전반을 검토하여 검찰청과 법원의 청사가 들어설 부지를 선정하기로 했다. 현장 답사도 여러 번 다녀왔다. 그 결과를 법원장님께도 수시로 보고하면서 심사숙고하여 대전광역시 시장과 행정당국의 협조를 얻어 최고의 입지를 골라 법원 검찰의 종합청사부지로 확정하였다. 거의 정방형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대로를 접한 땅이다.

이 터의 정남쪽 직선거리로 27㎞쯤 되는 곳에 큰 산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리면서 세워 놓은 우리나라의 명산 제7봉인 덕유산(德裕山)으로부터 계룡산(鷄龍山)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錦南正脈)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대둔산(大芚山)이 바로 그 산이다.

 

오늘에 와서 새삼스럽게 지도를 펴 놓고 해발 879m인 대둔산의 마천대(摩天臺)로부터 대전 시내에 이르기까지의 지세를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대전 시내를 관통하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 세 개가 있다. 모두 금강으로 흘러드는 물이다. 동쪽의 물줄기인 대전천과 유등천은 갑천과 합치기 전에 한 물줄기가 되고, 갑천이란 물은 서쪽에서 홀로 흘러 내려오다가 유등천과 합친다. 이 갑천과 유등천이 물을 섞는 지점에 큰 땅을 만들어 내니, 이곳이 곧 둔산 지역이라는 대전의 신도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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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둔산동 검찰청사    <사진=박현철 대검찰청 대변인 제공>

 

갑천과 유등천 모두 금남정맥의 명산인 대둔산으로부터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이다. 이 두 하천을 좌우로 거느리며 한 줄기의 산맥이 길게 이어지면서 높이를 낮추어 가는데, 그 산줄기가 바로 둔산 신도시 지역의 내룡(來龍)이다. 이 지역은 그런대로 꽤 넓은 땅이긴 하나 대둔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가 정기봉이란 산을 이루기 직전에는 갑천과 유등천은 서로의 간격을 급히 좁혀서 그 폭이 1㎞ 남짓하다. 그러므로 물줄기의 형태로만 보면 이 둔산 지역이라는 땅은 조롱박처럼 보이기도 하며, 어떤 종(鐘)의 모양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두 물줄기를 좌우로 거느리고 내려오는 한 줄기 산맥은 대둔산의 마천대로부터 시작되어 안평산(472m), 명막산(332m), 해설이산, 정기봉, 도솔산 등의 기봉(起峯)을 이루며 몸을 서서히 낮추어 달려오다가 둔산 지역에 이르러 위 두 하천이 합치는 곳에서 끝난다.

이 지역에 정부 대전청사, 대전광역시청, 대전지방법원과 검찰청, 대전지방경찰청, 대전시 서구청 등 관청 건물이 모두 들어서 있다. 이 지역 한복판에 대전지방법원과 대전지방검찰청의 청사가 세워진 것이다. 종의 한복판이 종심(鐘心)이므로 소리가 없을 수 없고, 조롱박의 한가운데는 소리가 증폭되는 곳이다. 바이올린이나 만돌린을 연상하면 그 이치를 쉽게 알 수 있다. 지세가 위와 같으므로 나는 그 형국을 ‘만대위명지지(萬代威名之地)’라고 이름한다.

이 땅을 절반으로 나누어 동쪽은 법원, 서쪽은 검찰청의 부지로 정했다. 그러나 정문은 따로 설계하여 서로 다르다. 법원과 검찰청이 예전처럼 출입문을 함께 쓰면 불편하기도 하려니와 이렇게 정문을 따로 둔 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다.

두 건물 모두 좌향이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이어서 전형적인 동사택(東四宅) 건물이다. 출입 정문이 하나라면 이 부지의 한복판이 될 것이므로 검찰청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법원에서 보면 그 정문이 축간인(丑艮寅)의 향(向)에 걸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양택풍수의 이론에 맞지 않는다. 법원의 정문이 양택풍수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없도록 법원과 검찰청의 정문을 별도로 설계한 것이었다.

중남수(中男水)와 중녀화(中女火)가 그 좌향이라, 젊은 남녀가 짝을 이루어 운우의 조화를 만들어 낼 것인즉, 굳이 그 장래가 어떻다고 예측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대위명지지에 세워진 자좌오향(子坐午向) 오문(午門)의 대전(大殿). 법원과 검찰의 앞날에 영광 있으라!

 

그러나 후인에게 이른다. 내가 늘어놓은 이런 말은 모두 양택풍수의 이론에 빗댄 췌언(贅言)이다. 사람 사는 집이 복가(福家)인지, 그 땅이 명당(明堂)인지는 하늘이 미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결국 그 땅과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명심하라!

내가 비록 한촌에서 산과 구름을 벗하여 지내는 촌로가 되었으나, 나의 젊은 시절의 적은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이런 뜻깊은 검찰의 역사에 조그마한 족적을 남겼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었음이로다.

이 글을 끝내기 전에 나를 훌륭한 후배로 여기며 큰일을 맡겨 처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이재화 선배님을 추모하며 몇 가지 글을 남겨야겠다.

이재화 법원장님께서는 전주 이씨 명문가의 후예로서 충북 중원 태생이다. 나보다 먼저 대전지방법원 원장으로 부임하셨고, 내가 대전지방검찰청을 떠나 중앙수사부장으로 재직 중인 때 서울가정법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되어 임기를 마치셨다. 그 이후 2020년 6월 4일에 서거하셨으니, 향년(享年)은 85세였고 그분의 호(號)는 익운(益運)이다.

그가 헌법재판관으로 봉직하시던 때에 『신재집(信齋集)』이라는 책 한 권을 내게 보내주셨다. 1997년이었으니 내가 법제처장직에 있던 때였다.

 

이 책은 전문 1,327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었다. 신재(信齋)는 익운 공의 선친인 이수원(李壽源) 선생의 호이고, 만년에 성균관 부관장을 역임하셨다. 신재 공의 이름으로 이미 한문 책자로 발간되었던 다섯 권의 고서(古書)를 이재화 원장님께서 합쳐 책 한 권으로 모아 만든 비매품 책인데, 내게 그 책 1권을 보내 주셨던 것이다.

책을 몇 장 펼쳐 보니 문집의 내용인 다섯 권의 책이 모두 한문으로만 되어 있어서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권과 2권은 한시(漢詩), 2권은 낙수(落穗)와 서(書), 3권은 서(書)·기(記)·발(跋)·행장(行狀)·제문(祭文) 및 잡서(雜書), 4권은 신도비(神道碑)와 묘갈명(墓碣銘), 5권은 군수경력(郡守經歷)·강론(講論) 및 논설(論說)이다.

 

부록으로 연보(年譜), 묘비명(墓碑銘), 전(傳), 회갑(回甲), 회혼(回婚), 팔순(八旬), 각시(各詩), 제문(祭文), 만사(挽詞),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익운 선생의 편후지(編後誌)가 들어 있는 책이었다.

이 마지막의 편후지가 이재화 법원장께서 쓰신 글인데, 전문이 한문이었으나 몇 개의 토를 달아 놓은 글임을 알았다. 1-5권은 너무 어려워 감히 읽을 수 없었고, 원장님의 편후지를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이 글에 토를 달아 놓았기 망정이지 그나마 없었더라면 뜻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글이었다. 문맥으로 겨우 이 글이 책을 펴낸 사연을 자세히 적어 놓은 명문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익운 선생께서 책의 말미에 직접 쓰신 편후지 중의 마지막 몇 구절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一日十二時에 未能忘典型於寸刻이러니 未賴選集이 未久出於世로 少慰於不孝之罪하오니 皆是諸先生이 眷愛惠施之恩이라 將何以報答前一哉아 祗自惶感而己로라 際刊事將終하여 敢書數行文하여 以爲編後誌하노라. 丙子八月晦間不肖孤在華泣血謹識하노라.”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다는 뜻의 ‘안거문유(人去文遺) 기수영창(其壽永昌)’이란 말을 되새기게 하는 글이었다. 익운 이재화 원장님께 경의를 표하며 명복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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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떠난 다음, 대전지방검찰청 간부의 이름이 연명으로 새겨진 1992년 7월 28일자 나의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직기념패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실로 전달되었다. 그 기념패에 새겨진 명단은 다음과 같다.


차장검사 - 柳在成.
부장검사 - 李宗基, 金鎭寬, 李棋培.
검 사 - 李康天, 李炳憲, 李廷基, 金振吾, 李權載, 權善龍, 宋海?, 崔益錫, 康東元, 安赫煥, 李濬明, 朴興植, 洪景嶺.
사무국장 - 李啓承. 서무과장 鄭泰鉉. 사건과장 金仁善. 수사과장 金東植. 공안과장 崔仁柱. 집행과장 金東植. 수사관 - 裵洙滿, 李烋信, 李龜洙.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임 기간 중의 관하 지청장 명단을 아래에 적는다.
천안지청장 - 咸錫宰, 徐燉洋.
서산지청장 - 趙昌九, 李炳基.
홍성지청장 - 陳隆治, 金次會.
공주지청장 - 文永皓, 金大權.
강경지청장 - 林梁云, 趙承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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