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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K-억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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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이 2020년에 아카데미 작품상 포함 4개 부문을 수상하더니, 올해는 <오징어 게임>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인 ‘에미상’의 드라마 작품상 등 14개 부문의 후보로 올랐다. 이 작품들은 국내보다 서양에서 더 화제가 되고 있는데, 특히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묘사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한국인 특유의 심정적 감수성과 표현력이 더 어필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최상진 교수의 《한국인의 심리학》에 의하면,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현상으로 ‘심정(心情)’이 있는데, 심정은 이성과 감성의 중간 정도 또는 인식이나 판단과 감정이 뒤섞인 영역에 존재하고, ‘섭섭함, 안쓰러움, 정듦, 한스러움, 분함, 서러움, 억울함’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자주 느끼고 표현하는 이런 심정들이 서양인에게는 낯설고 흥미로울 수 있다. 나는 심정의 대표적인 예가 재판에서도 자주 접하는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하다는 말은 원래 ‘억누르다’는 뜻의 ‘억(抑)’과 ‘막혀서 통하지 않다’는 뜻의 ‘울(鬱)’이 합쳐진 한자어다. 국어 사전상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문맥에 따라 다르지만 ‘feel’과 ‘unfair’를 넣어서 번역하는 사람들이 많다. 억울함은 결국 남으로부터 좋지 않은 대우나 처분을 받았는데,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주관적인 느낌을 말한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더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유로, 흔히 개발도상국과 권위주의 시대를 겪으면서 개인의 권리구제의 폭이 지나치게 좁았다는 점, 돈과 힘 있는 사람의 편을 드는 것 같은 권력에 대한 불신, 자신보다 남을 탓하는 풍조 같은 것들이 열거된다. 나는 거기에다가 우리의 예민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추가하고 싶다.

국민이 강렬하게 호소하는 억울함은
개인의 권리구제에 대한 적극적 태도
불미스러운 상황 모두 억울하다 하면
재판정·드라마에서 모두 설득력 잃어


나는 <기생충>에서 그 특유의 ‘냄새’를 가지고 계층의 낙인을 찍는 방식이나 ‘선을 넘었다’는 말로 넘어서는 안 되는 벽을 표현하는 기술에 놀랐고, <오징어 게임>에서는 기훈이 구슬 하나와 구슬 19개를 걸고 단판 승부를 하자는 일남의 말에 불공평하다고 거절하자, 일남이 “그럼 날 속이고 가져간 건 말이 되고?”라고 하는 데서 나도 모르게 ‘그렇지!’라고 외쳤다.

우리 국민들이 강렬하게 호소하는 억울함은 긍정적으로는 개인의 권리구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사회적 정의구현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억지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도 상당히 있고, 본질적으로 남에게 탓을 돌릴 ‘억울함’이 아니라 본인이 감내해야 할 ‘서러움’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도 많다. 이런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뭔가 불만스러운 상황을 모두 다 억울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재판정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해석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재판정에서 만일 기택이 ‘냄새’와 ‘선을 넘었다’는 말에 격분해 박 사장을 죽였다고 말했다면,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상황과 맥락을 생략하고 단지 ‘햇빛이 눈부셔서’ 살인을 했다고 말한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어서 중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어느새 기택이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여기서의 공감은 억울함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과하다.

한국인의 뛰어난 심정적 감수성과 표현력이 빛을 발하는 우리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다. 우리가 남다르게 활용하는 ‘억울함’ 같은 ‘심정’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더욱 주목받을 수 있길 기대한다. 대중문화에서는 진부한 설정이나 상투적인 표현, 일명 ‘클리셰(cliche)’가 되지 않길 바라고, 재판정에서는 예리한 사실과 논리로 호소해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영근 지원장(남양주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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