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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전문 (9)

[송종의 회고록 전문 (9)]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2부 가필(加筆) ⑨ 영전인가? 좌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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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의 추억을 되살리는 두 점의 서화(書畫)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

(1985. 3. 12. - 1986. 5. 5.)

 


내가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1부장에서 전주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로 전보된 것은 당시 법무부 장관의 특별한 인사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경위를 간략히 적어 둔다.


서울지방검찰청의 부장검사 중 공안부장, 형사 제1부장과 특별수사 제1부장 등 세 자리는 어느 정도 영전이 보장된 직책이었다. 나 스스로 대과 없이 특별수사부장으로 근무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인사 발령을 받고 보니 이것은 영전이 아니라 좌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도 작은 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는 서울 본청의 부장검사로 전속되기를 희망하던 시기이므로 청의 규모도 작고, 교통도 매우 불편하였던 전주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로 발령된 것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종남 검사장실을 찾아갔다.


이 검사장님께서도 수긍할 수 없는 인사라고 생각하였던지, 검찰총장에게 가서 어떻게 된 것인지 한번 알아보자고 하신 후 즉시 나를 대동하고 당시의 검찰 종합청사 8층에 있던 검찰총장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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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발간된 전주지방검찰사 책에 수록된 전주지검 청사 모습

 

 

 

이 인사 발령 당시의 법무부 장관은 김석휘(金錫輝), 검찰총장은 서동권(徐東權) 씨였다. 김석휘 장관은 나의 특수부장 재임 시의 2년 8개월간 검찰총장이었고, 그의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시절, 나는 형사 제3부의 검사였다. 그는 나를 유능한 검사로 높이 평가해 주시던 분이었고, 서동권 검찰총장은 나의 대구지검 검사 시절 상석 검사로서 내가 법무과장 때 차관으로 모셨으며, 검찰총장이 된 후 1개월 정도 나는 특수1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종남 검사장과 서동권 검찰총장은 고려대학교 동문이어서 평소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 검사장께서 송 부장의 인사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검찰총장께 물었다. 검찰총장께서도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그 자리에서 즉시 법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장께서 장관과 한참 통화한 다음 내게 전한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송 부장에 대한 이번 인사는 장관의 특별한 인사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즉, 우리 검찰의 인사 관행을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작은 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라 하더라도 그 직책이 부장검사를 지휘하는 상 서열이므로 지방검찰청 본청의 차장검사가 서울지검의 부장검사로 발령 나는 것을 마치 영전처럼 여기는 풍토는 이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또 아무리 작은 지청이라 하더라도 지청장은 작은 검찰총장이므로 이 지청장을 우대하는 인사 관행이 정착되어야 한다.


장관의 이런 인사 원칙이 자리 잡으려면 부장검사 중 유능한 사람을 발탁하여 작은 검찰청의 차장검사 보직을 주어야 하는데, 이는 누가 보더라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서울지방검찰청의 가장 유능한 부장검사라는 평을 듣던 사람을 차장검사로 보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송종의라는 부장검사를 차장검사로 발탁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비록 작은 검찰청이긴 하나 송 부장을 전주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로 발령한 것이다.


장관의 이런 뜻을 깊이 이해하여 본인이 섭섭하지 않도록 장관의 인사 방침을 잘 설명해 주라는 취지의 전화였다는 것이다. 검찰총장께서도 이런 사정을 미처 몰랐던 탓에 장관과 통화한 후에 그 내용을 소상히 일러 준 것이었다. 이종남 검사장이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길로 검찰총장실을 나와 즉시 전주지검으로 부임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전주지방검찰청의 제20대 차장검사가 된 사정이다. 이 인사가 이루어진 후 장관의 이런 인사 방침이 대대적으로 홍보된 것은 물론이다.


장관의 인사 방침이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 전주지방검찰청이란 낯선 검찰청으로 부임하는 나의 마음은 별로 편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1973년에 서울지검 성동지청 검사로 부임한 이후 1985년까지 만 12년간 서울에서만 근무했던 나로서는 이제부터 고달픈 타향살이가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수1부장서 전주지검 차장검사 전보
영전 아닌 좌천 느낌에 연유를 알아보니
부장검사를 지휘하는 차장검사와
지청장 우대 인사관행 정착하기 위한
당시 법무부 장관의 특별한 인사 원칙


명절 임박하여 찾아온 지역사업가
봉투 두고 가기에 정중히 거절했더니
서예가 글씨 받아 가리개 만들어 와
법관으로부터 받은 산수화와 함께
지금도 내가 사는 천고재 한 켠에…
 


 

 

그나마 나에게 위로를 준 것은 이 전주지검으로부터 내가 밤나무를 심어 놓은 논산의 양촌이 불과 40㎞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였으므로 서울에 살면서 주말에 틈을 내어 왕복 400여 ㎞를 다녀야 하는 고달픔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의 밤나무 산에는 임시로 기거할 수 있는 농막 같은 집이 있었으므로 천천히 다녀도 자동차로 1시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곳에 가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검찰청으로 출근하기도 했다.


전주지검은 전라북도 전체를 관할하는 검찰청으로서 산하에 3개의 지청이 있었다. 군산, 정읍, 남원지청이다. 군산과 정읍은 합의지청이고, 남원은 단독지청이었다. 본청은 전주시와 김제, 완주, 임실, 진안, 무주 등 5개 군을 관할하는 검찰청이었으나, 전주시 이외에는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어서 별로 큰 사건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군산지청은 군산시와 이리시(현재 익산시)를 관할하고 있는 지청이었으므로 사건의 질로 보면 오히려 본청보다 군산지청에서 더 큰 사건이 빈발하고 있었다.


부임 직후 검찰 직원의 현황을 파악해 보니, 나와 같은 날짜로 부임한 전팔현(全八現) 씨가 군산지청장, 양현국(梁鉉局) 씨가 정읍지청장, 임성재(任聖宰) 씨가 남원지청장이었다. 전팔현 씨는 고시 14회로서 법대 7년 선배, 양현국 씨는 고시 16회로서 법대 1년 선배였으며, 대학 후배인 깁봉환(金奉煥) 부장검사 밑의 평검사 5명 중 선임인 J씨는 사법시험 2회에 합격한 법대 2년 선배였다.


아무리 차장검사라 하더라도 사정이 이러하였으니 이 직책의 수행이 말 그대로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검사장은 나의 많지 않은 고등학교 선배 중 한 사람으로서 용산고등학교 3년 선배인 김주한(金宙漢) 씨였다. 서울공대 출신으로서 훗날 대법관을 역임하였으며, 가히 ‘현세의 선비’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우선 하숙집을 정해야 하였기에 사무국에 지시하여 사정을 알아보도록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검찰청의 차장검사를 하숙생으로 받아 주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정이지만 평검사도 하숙생으로 받기에 만만치 않은 벼슬인데, 더구나 검찰청의 차장검사라고 하니 더욱 어렵다고 했다. 부득이 시내 어느 여관의 한구석에 방을 얻어 잠자리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전주지검 재임 시에 사용했던 검찰 업무 일지는 온전히 남아 있으므로 일별해 보니, 매일매일의 업무를 처리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이는 극히 통상적인 검찰의 업무 내용일 뿐,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평검사 5-6명 중 위 J 검사를 제외한 나머지 검사 대부분이 초임이거나 경력이 일천한 검사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사건 처리가 치밀하지 못하여 눈에 띄는 몇 가지 사례를 표본적으로 골라 부전지를 달아 내려보냈더니 이 방 저 방에서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지적해 내려보낸 것은 내가 대구지검 초임 검사 시절 겪었던 일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차장검사가 하도 까다로워서 일 처리가 힘들다는 불평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복무 방침으로 인하여 그들은 점차 검사로서의 수사 역량이 함양되었다고 믿는다. 대구지검 시절처럼 이 부전지를 묶어 차장검사 지시 사항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이 부전지를 근거로 검사들의 사건 처리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검사장에게 매달 보고드렸다.


전주라는 곳은 조선 개국시조인 이성계의 본향으로서 경기전(慶基殿)이란 곳이 이곳에 있다. 옛날부터 많은 호족이 거주해 왔던 곳으로서 교육과 문화의 도시이며 서화에 재능이 있는 문인과 화가들이 많이 배출된 예향이기도 하다. 경기전은 전라북도 전주시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므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김에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인터넷을 검색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옮겨 여기에 적어 둔다.


“경기전은 1410년(조선 태종 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전각이다. 준원전(濬源殿), 영희전(永禧殿)에도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令, 從五品) 1명, 참봉(參奉, 從九品) 1명이 배속되었다.


1442년(세종 24년) 전주의 어용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317호인 이성계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산재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만의 독특한 생활문화 공간이다.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옛 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라는 곳은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특색 있는 한식집이 많기로 유명하다. 어느 곳, 어느 음식점에 가더라도 입에 맞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객지이긴 하나 음식으로 고생한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때까지 접하지 못했던 특색 있는 향토 음식을 즐기는 행운이 있게 된 것이다.


요즈음은 전라도 음식이 한정식의 표준이 될 만큼 이 지방의 음식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과연 그럴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호남 지방이라 하더라도 전라남도의 음식은 맵고 짠 음식이 많았으나 이 지방은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지역적인 특징도 전라남도와 달리 오히려 충청도 지방과 비슷한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계룡산 남쪽 기슭으로부터 시작된 호남평야가 거의 일망무제인 상태로 전남 장성 지방까지 이어지니, 생활의 풍습이나 사람의 행동 양식이 충청도와 거의 다름이 없다고 느껴진다.


전주가 예향(藝鄕)이었으므로 서화에 관한 이야기 몇 개를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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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천(碧川) 나상목(羅相沐) 씨가 그린 산수화(좌) · 소남 휘호의 가리개(우)


내가 전주에 근무하였던 덕분에 귀중한 서화 두세 점이 내 손에 들어와 지금껏 소장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독서익인의지(讀書益人意智) 학도토이총명(學道吐爾聰明)’이란 12자의 예서를 두 쪽으로 표구해 만든 가리개 1개이다.


어느 날 전주지검 차장검사실로 그 지방의 유지 한 분이 찾아왔다. 아마 추석이나 설 명절이 임박하였던 때였을 것이다. 이분께서 명함을 내밀기에 살펴보니, 그 지방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 후에 그가 봉투 한 개를 꺼내 응접탁자에 놓고 가려고 하므로 이를 정중히 거절하면서 호의만을 고맙게 받겠다고 말했다. 매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 쌀쌀맞게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이미 거절한 것을 다시 거두어들일 형편은 아니었다. 검사님의 성품을 잘 알지 못하여 큰 실례를 범한 듯하니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이분께서 다시 찾아왔다. 이미 인사를 나누었던 탓에 차 한 잔 대접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일전에 실례를 범한 후 돌아가서 검사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니 검사님께서는 당연히 그 봉투를 받지 않을 분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성의라고 표시하였던 사람으로서 그렇다고 그대로 모른 체하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닌 듯하여 이 지방의 유명한 서예가 한 분을 찾아가 두 폭의 글을 받아 왔다고 했다. 그 글만을 드릴 수가 없어서 이를 가리개로 만들어 가져왔다며 이 호의마저 거절하신다면 본인으로서는 매우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분께서 처음 찾아왔다가 돌아간 이후 그에 대하여 알아보니 관내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긴 하나, 매우 좋은 평을 듣던 사람으로서 검찰에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고맙다는 말과 잘 간직하겠다는 말 이외에 마땅히 찾을 말이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그가 만들어 준 가리개 표구 1점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


그 글을 써 준 사람은 소남(素南) 이규진(李圭鎭) 씨였으며, 그가 만들어 준 가리개는 지금 내가 사는 천고재(天古齋)의 안방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늘 위와 같은 사연과 그와의 대화 장면이 생각난다. 그가 놓고 간 돈 봉투를 내가 받지 않음으로써 모르기는 몰라도 그는 그 돈보다도 더 큰 돈을 들여 서예가로부터 글씨를 받아 이를 표구하여 가리개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남 선생은 뒤에 말하는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 씨 등과 함께 이 지방을 대표하는 서예가였으며, 현재 무주 적상산(赤裳山) 안국사(安國寺)에 있는 청하루(淸霞樓)의 현판이 그분의 글씨이다.


두 번째는 벽천(碧川) 나상목(羅相沐) 씨가 그린 산수화 1점이다.


당시 모 지방법원에 근무하던 나의 대학 3년 후배인 이 지방 출신 부장판사 한 분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으나 검찰에서 취급 중인 어떤 사건의 선처를 부탁해 왔다. 살펴보니 별것이 아닌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관이 모처럼 부탁하는 사건이었으므로 신속하게 원만히 처리하여 마무리지었다.


얼마 후 그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 감사의 뜻으로 놓고 간 것이 벽천 나상목 씨의 산수화이다. 벽천 선생은 당시에도 호남 지방에서는 유명한 화백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초록색보다 더 짙푸른 청색을 사용하여 산수화를 그리는 화백이었다. 이 귀중한 산수화는 내가 표구하여 현재 내가 사는 천고재의 2층 거실 벽에 걸려 있다. 이것이 법관으로부터 받은 호의였으니 설마 법원의 재판받을 일이야 있겠는가?


세 번째는 강암 송성용 선생의 휘호로 각인된 현판 1개이다.


이 귀중한 현판이 내 손에 들어오긴 하였으나, 1995년에 소실되어 현재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전주지검 차장으로 근무할 당시 사무국의 간부로서 능력과 인품이 출중한 검찰사무직 한 분이 있었다. 소병일(蘇秉一)이란 사람이다. 이분께서는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별세하셨다. 내가 논산 밤나무 산에 10여 평의 관리사를 짓고, 그 집의 옥호를 무애산방(無礙山房)이라 이름한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 된 그가 강암 선생의 독특한 필체로 된 그 농막의 이름을 괴목 나무판에 새겨 선물로 준 것이었다.


강암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예가였다. 이 귀중한 현판을 그 집에 걸어 놓았으나 대검 차장검사의 직에서 퇴직한 후 잠시 미국을 다녀왔더니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위 관리사가 전소됨으로써 이 귀중품 역시 불타 없어져 버렸다. 전주 IC 부근 8차선 기린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일주문 현판의 ‘湖南第一門(호남제일문)’이란 다섯 글자가 그분의 글씨다.


위 세 개의 서화가 내가 전주지검 차장으로 근무하였던 인연으로 내게 온 귀중한 물건이다. 내가 위 3개의 서화를 전주에서 얻었으나, 나는 제8대 조계종 종정이었던 서암(西庵) 스님의 휘호 두 개를 표구하여 전주지검에 남기고 왔다.


내가 서울지검 특수부장으로 근무했던 시절, 연초 연휴에 경북 문경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절의 조실(祖室) 스님이 서암 대선사였다. 불세출의 선승이었던 그 노장께서 나를 어떻게 보았던지 즉석에서 4자로 된 행서체(行書體) 두 폭의 글을 써 주셨다.


하나는 ‘처렴상정(處染常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었다. 가로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신 이 글을 표구하여 ‘처렴상정’이란 글을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실에 걸어 두었다. 오염된 세상에 있더라도 항시 깨끗한 삶을 살라는 뜻이었으니 검사실에 걸릴 만한 글이었다. ‘상락아정’ 또한 전주지검에 그대로 놓아두고 왔으나 세월이 오래 흘렀으니 그 보존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 보존되어 있다 하더라도 물론 이런 깊은 사연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서암 스님의 속명은 송홍근(宋鴻根)이고, 1917년 10월 8일 경북 안동시 녹전면 구동리에서 부 송동식(宋東植), 모 신동경(申東卿)의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나 만년에 봉암사에 주석하셨다. 2003년 3월 29일 입적(入寂)하셨으니 법랍(法臘)은 68세, 세수(世壽)는 87세였다. “누가 묻거든 그 노장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라는 유명한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그 노장의 모습을 왜 지금은 찾을 수 없는가?


전주지검에 근무하면서 위 소병일 공을 만났던 덕분에 나는 그때까지도 가 보지 못했던 지리산(智異山) 자락의 여러 골짜기를 누비며 곳곳에 들어서 있는 유서 깊은 많은 고찰(古刹)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지리산의 서쪽 기봉(起峯)인 노고단(老姑壇)으로부터 동쪽의 주봉(主峯)인 천왕봉(天王峰)까지 이어지는 해발 1,400미터 이상의 능선을 종주하는 경험도 얻었다.


“산이 빼어나기는 금강(金剛)이 으뜸이고, 웅장하기로는 지리산을 당할 산이 없다. 빼어나고 웅장한 산은 묘향(妙香)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부르는 휴정(休靜) 청허선사(淸虛禪師)의 말씀이다. 지리산은 3개 도, 5개 군, 16개 면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산인 것을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다. 나는 전주에 오기 전까지 노고단 한 곳밖에 오른 적이 없었다.


내가 전주에 와서 둘러보게 된 고찰은 남원의 실상사(實相寺), 함양의 벽송사(碧松寺), 산청의 대원사(大源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법계사(法界寺), 칠불사(七佛寺), 구례의 연곡사(燕谷寺), 화엄사(華嚴寺), 천은사(泉隱寺) 등이었다. 지리산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서 가본 여러 골짜기와 대소 사암(寺庵)을 모두 찾을 수 있는 행운은 전주지검이 내게 준 크나큰 선물이었다.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의 재직기념패는 내게 없다. 소속 검사와 검찰직 간부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어 여기에 적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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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전주지방감찰청 검사장 김주한(金宙漢) 선배님께 경의를 표하며 소병일 공의 명복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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